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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코리안 다크 나이트, 어둔 밤. 어? 뭔가 이상한데.

<어둔 밤, 2017>

1


 프랑스 누벨바그의 상징이자 못말리는 영화광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로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을 제시했고, 그 이상은 없다고 단언했다. 하기야 조금 비약해,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감독과 카메라의 시야를 비롯한 감각의 공유, 나아가 일치시킨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고, 그말인즉슨 비로소 스스로 영화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 영화가 된다! 이른바 씨네필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문장은 없을지도 모른다. 씨네필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기에는 아직 그 정도까지 영화와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했는지에 항상 의문을 품게 되는 나마저도, 영화를 찍는다는 상상을 하면 여지없이 가슴이 설레곤 한다. 길가를 거니다보면 '싼 곳 찾다가 없어서 직접 차린 집!' 이라고 홍보하는 싸구려 문구에 피식하곤 하는데, 추구하는 목표는 다를지언정 나에게 있어 영화를 찍는다는 상상은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내가 하면 저것보다 더 잘 할 수 있겠지, 에서 비롯되는 생각일테다. 매주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수는 많은데 볼 영화가 없다.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극장에 가서 팔짱을 끼고 보다 보면 역시 안 보는 편이 나았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깨나 봤다는 사람치고 한국 영화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소고를 생각으로나마 문장화시켜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거라 확신할 수 있다. 공식 인터뷰에서 대담하게 이런 발언을 일삼는 사람이야 지극히 적지만, 대다수의 젊은 감독들은 실제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영화계로 뛰어든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영화들의 아쉬운 점들을 전부 보완해서, 심지어 그것보다 한 단계 넘어선 새로운 어떤 걸 포함한 궁극의 영화를 내 손으로는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야망은, 훌륭한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문제는 완벽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는 데에서 온다. 정말 극소수의 감독을 제외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영화를 일부러 망치는 감독은 없다. 그들 자신도 영화깨나 본사람일진대, 완성된 작품이 구리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수만가지나 된다. 가장 큰 예산이나 투자 유치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시나리오와 실제 연기 간의 괴리, 자기 맘대로만 할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행위자들의 입김, 촬영장의 분위기, 날씨, 스케쥴 조정 등등... 우여곡절 끝에 찍고 나면 이제 편집을 해야 한다. 편집은 촬영보다 더 어렵다. 한정된 씬을 가지고 하나의 영화를 만드는 건 레고로 조립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볼 때마다 다시 찍고 싶어지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짜맞추다 보면 처음의 기획은 어디로 가고, 얼기설기 완성만 된 영화가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완벽주의에 찌들다보면 이 수많은 어려움들을 '그들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완성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마련이고, 정말 중요한 것들보다 사소한 디테일에만 신경쓰게 된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영화는 완성되긴 할 것이나, 그 결과물은 자신이 비난하던 그것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완벽주의가 스스로 완벽해지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고야 만 것이다.


 논리의 전개를 조금 뒤로 돌려보자. 감독은 순수해져야만 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그 동기가 현재 영화계에 대한 아쉬움, 혹은 자신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영화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영화 제작에의 열망으로 동기를 가득 채워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영화 제작에 산재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큰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지,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한 무엇이란 영원히 닿기 힘들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허상에 불과하다. 꿩이 없다면 닭으로,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 완성시킨 결과물은 물론 어설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작품에 담뿍 담긴 영화에 대한 그 깊고 짙은 사랑을, 관객들은 알아채고야 말 것이다.



2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어둔 밤>은 그러므로 적당주의의 완전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목적은 일단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 무엇을 만들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완성하는 것만이 이들의 최종목적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 동아리의 자칭 영화 전문가들이다. 영화깨나 봤다고 으스대는 이들은 동아리에 처음 온 신입생들에게 영화 지식을 뽐내며 으스대기 바쁘고, 거장들의 영화를 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주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이게 감독, 나아가 이 영화를 함께 만들기로 한 감독의 동료들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 익숙한 주변의 환경을 영화로 만들기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에서 흥미로운 일인데, 첫 번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것들이 '영화적인 무언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 주변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굳이 영화로 조명하여 무언가 메세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어둔 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단순히 그들의 주변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하다 할 것들이 없다. 이걸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랜덤하게 뽑아낸 것 같은 일상의 조각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이와 연결되는 지점인데, 익숙한 홈그라운드에서 진행되니만큼 현실감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영화적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크게 노력해서 연기할 필요가 없다. 하던대로 하기만 하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일단 만들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적당주의의 대전제에 부합하는 요소이다. 대충 연기해놓고는 '현실감'이라고 얼렁뚱땀 넘어가도 관객들은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을 만들지가 중요치 않다고 상술한 바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건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나머지 무리수를 두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은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체 제작', '저예산 영화'의 두 타이틀과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장르를 선택한다. 바로 '히어로 장르'의 영화다. 심지어 이들은 CG조차 쓰지 않고 모든 장면을 직접 구현하기를 선호하는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를 오마주하길 택한다. (영화의 제목 '어둔 밤'이, '다크 나이트'의 나이트를 기사가 아닌 밤으로 오역한 조잡한 해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너무 뻔뻔한 나머지 오히려 헛웃음이 난다.) 그리고서는 놀란의 그런 선택이 두려웠는지 극중에서는 '놀란도 CG 쓰지 않나?'하는 변명거리마저 마련하는 모습이 천진해보인다.


 어쨌든 히어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 건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방법으로는 히어로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교묘하게 영화 속에 숨겨놓은 현명한 연출 방법이 있다. 진짜 만들고자 하는 영화를 극중극 형태로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장편 영화를 개봉시키면서도, 자신들의 한계인 단편 영화를 함께 개봉시킬 수 있다. 그들은 자신 주변의 이야기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요소가 가질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인 '영화 제작'을 살려 영화 안에서 영화를 제작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현실감과 뻔뻔함을 통해 살린 헛웃음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메이킹필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영상은 영화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영화의 후반부는 재기발랄하고 블랙코미디 적 요소가 풍부하지만 홀로 서기에는 너무 부족한 영상물이다. 하지만 이 반쪽짜리 영상물 두개가 합쳐져 <어둔 밤>으로 완성되는 순간,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상황에 맞게 적당히 만든 영화 같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짜여져 있는 계획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관객은 좋은 쪽으로의 충격을 받게 된다. 혹은, 얻어걸린 걸수도 있지만.



3


 '이런 영화들이 한국 영화에 더 등장해야 한다!'는 자주 들었던, 이제는 클리셰에 가까운 말들이다. 물론 동의하는 바이나, 사실은 좀 더 명확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이런 영화들'에서의 '이런'은 어떤 특정 작품과 같은 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성 영화들이 가지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어떤 새로움과 신선함과 도전정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쉬이 범주화할 수 없다. 가능성과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어둔 밤>에는 애정을 듬뿍 담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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