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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Dec 22. 2023

정상까지만 다녀오세요

제주에는 설문대할망이 치마로 흙을 나르면서 한 줌씩 집어놓아 만든 오름이 368개가 있다고 한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 매년 들불 축제가 열려 민둥산처럼 하얗게 보이는 새별오름, 한라산 백록담과 비견되는 금악담이 있는 금오름, 옥녀금차형(玉女金叉形) 명당이 있다는 정물오름, 일망무애(一望無涯) 풍경이 일품인 군산오름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들 외에 어느 오름인들 매력을 품고 있지 않을까? 오름들이 제각각 갖고 있는 매력에 반해서 사진작가 김영갑은 오름과 억새에 몰두했나 보다. 김영갑이 사랑한 오름에 내 마음도 끌렸다.

제주의 가을은 억새와 함께 시작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산굼부리나 새별오름, 다랑쉬오름, 따라비오름 등이 명소로 꼽힌다. ‘비너스의 가슴’에 비유되는 아름다운 다랑쉬오름의 억새는 고혹적이었다. 매년 들불 축제가 열려 민둥산처럼 보이는 새별오름의 억새는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여주었다. 물이 마른 금오름의 금악담은 물에 비친 푸른 하늘 대신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를 보여주었다. 오름에만 억새가 있을까? 오름이 아니어도 눈길 닿는 곳마다, 발길이 미치는 곳마다 억새는 물결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제주의 가을 색은 물결치는 억새가 만들어내는 은빛이다.


이번 여행은 노꼬메오름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노꼬메오름의 한자 표기는 녹고악(鹿高岳)이다. 사슴이 살았던 높은 오름이라는 것이다. 숙소를 나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TV에서 제법 많은 비가 올 거라고 예보하더니 이미 시작된 모양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노꼬메오름으로 향했다. 비바람이 거세지면 돌아설 요량으로…. 소길 공동목장 앞에 있는 오름 주차장에 도착하자 비가 잦아들더니 곧 멎었다. 주변을 살피자 익숙했던 제주의 오름 대신 태산준령이 우뚝우뚝 자리한 깊은 산골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노꼬메오름도 지금까지 올랐던 오름과는 달리 높고 뾰족한 ‘산’처럼 보였다. 아하, 그래서 한자 이름에 높을 고(高)가 들어있구나!

언제 비가 다시 올지 몰라 오름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마침 노꼬메오름 쪽에서 오는 두 여자를 만났다. “왼쪽과 오른쪽 오름 가운데 어느 것이 노꼬메오름인가요?”하고 묻자 한 여자가 무뚝뚝하게 “저 앞에 안내판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살짝 민망했지만 “분화구를 한 바퀴 도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하고 다시 물었다. 두 여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처음이면 정상까지만 다녀오세요.”라며 아리송하게 대답하고는 묘한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과 헤어져 잠시 걸으니 산담으로 둘러싼 공동묘지가 나오고 곧이어 빽빽한 숲길이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정상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다행히 초입에는 숲이 멋지고 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중간쯤 지나자 오름의 숲은 더 울창해지고 경사는 급해졌다. 게다가 화산석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허위허위 올라가자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고 발아래 많은 오름이 보였다. 화구벽 능선이었다. 마치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에서 본 ‘푸른 바다의 고개, 벽파령(碧波嶺)’처럼 높고 낮은 오름의 바다가 발아래 펼쳐졌다. 장관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애월 쪽에서 짙은 해무가 빠르게 밀려왔다. 정상을 밟아보고 싶어서, 그곳에서의 풍경도 보고 싶어서 서둘러 올라갔지만 5분도 채 되지 않아 짙은 안개가 온 산을 뒤덮었다. 일망무애의 풍경이 한순간에 오리무중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뒤이어 거센 바람이 비를 몰고 들이닥쳤다. 높은 산 정상에서 속수무책으로 맞는 비바람이라니….

가방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우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바람이었다. 청바지가 레깅스로 바뀌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박이 섞인 빗속을 뚫고 정신없이 내려오다 짙은 안개와 비에 잠긴 몽환적인 숲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환상적인 숲의 풍경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풍경에 반해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오름 입구까지 내려왔다. 내려선 다음에야 ‘처음이면 정상까지만 다녀오세요.’라는 대답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노꼬메는 한쪽이 트인 말굽형이어서 분화구를 돌 수 없는 오름이었다.



368개나 되는 제주 오름. 오름에는 으레 분화구가 있고, 분화구를 따라 돌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노꼬메오름이 깨주었다. 오름 가운데 정상까지만 다녀올 수 있는 오름은 몇 개일까? 화구를 따라 돌며 오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름은 또 몇 개일까? 궁금해하지 말자. 그들과 친구 맺고 하나씩 만나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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