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35. 뿌리 없는 나무가 되어 한국을 걸어 다니던 묘연한 시간 (작년 2022년 2월 초에 저장해 둔 글입니다^^ 1년 하고도 반이 지난 지금은 생각도 상황도 많이 달라졌네요.)
자가격리가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정말 그대로인 친구들도 있었고, 모인 자리에서 갑작스레 결혼 발표하는 친구도 있었으며, 가치관이나 스타일이 좀 바뀐 친구도 있었다. 어딜 가나 한글이 쓰여 있다는 점도 오랜만이라 생경하면서도 반갑게 느껴졌는데, 친구들의 바뀐 주제도 못지않게 생경했다. 2~3년 전만 해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었던 것 같은데, 돌아와 보니 주제는 본격적으로 더 일, 결혼, 돈에 집중되어 있었다. 올해나 내년에 결혼한다는 친구들이 갑자기 많아져서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나의 30대에서 2년이 분절되어서일까. 한국에서도, 락다운으로 인해 해외에서도, 끊어진 2년의 마디마디는 나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동시에 나는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나는 한국이나 말레이시아 어느 한 곳에 당장 최종적으로 정착한 것이 아닌 상태였다. 따라서 한국 고향에 돌아와서 좋았지만 집, 결혼 등등을 당장 한국에서 계획하고 뿌리를 내릴 생각은 아직 없는 상태였다. 정확히 발 붙이고 뿌리내린 상태가 아니다 보니, 친구들의 깊고 진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에 관한 에스프레소 같은 이야기, 홍삼진액 같은 이야기에는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때로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해외에서 아직 더 살 예정인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가? 싶게 말이다. 워낙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고 한 곳에 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고향에서 편하게 정착해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과 아직 더 해외에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들이 섞여서 부조화와 혼란의 물결을 만들었다. 친구들이 5시간 동안 드레스나 웨딩사진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전셋집과 자가 관련 이야기를 할 때,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한 게 아닌 나로서는 격렬하게 공감할 테마가 못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집을 렌트할 수 있고, 아끼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한국보다 렌트비 등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 당장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아기 낳을 생각이 없는 내게는 결혼도 급한 주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붕 뜬 기분 없이 터전을 잡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거니 싶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들의 어떤 주제들은 재미있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고 만나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친구들과, 해외에 살면서 멀어진 일부의 인간관계들을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순간을 함께했던 시절 인연들과, 여전히 공간과 물리적 거리를 넘어 나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친구들을 동시에 바라보게 되었다. 이어질 인연들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각자의 삶의 행보가 달라지면서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인연들은 또 자연스럽게 그렇게 멀어지는 것. 한편 새로운 인연 역시 한국에서든 말레이시아에서든 그 순간순간에 새로운 인연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묘한 감정 속에서 시간과 공간과 거리와 인연을 돌아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