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시옷 Feb 12. 2019

속물적인 여행지 선택

감흥이 경비와 비례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는 태국에만 다섯 번을 다녀왔다. (에게, 겨우?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 기준 제일 많이 간 곳이다) 언제든 ‘지금 가고 싶은 곳 있어?’라고 물으면 ‘방콕!’하고 그냥 대답이 나와버린다. 그만큼 방콕이 좋다.


  태국이 좋은 이유에 대해서라면 수없이 많이 말할 수 있다. 따뜻해서, 음식이 맛있어서, 좋은 숙소가 많으니까, 열대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마사지나 스파를 받기 좋아서 등등. 그러나 결국 내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도 마주하게 된다. 내가 태국을 좋아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결국 물가가 싸기 때문이라는 거다.


  물가가 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걸 의미한다. 홍콩에서 30만 원에 묵었던 숙소보다 더 좋은 숙소를 반값에 머물 수 있다. 한국에서 평소에 회사 근처에서 쓰는 점심값으로 방콕에선 분위기 있는 곳에서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100-150바트의 싼 마사지샵과 비싼 스파를 번갈아 가며 매일매일 받을 수 있다. 비싸다고 해도 한국보다는 훨씬 싸다. 5성급 호텔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훨씬 싸서 이때다 싶어 사치를 부리기도 좋다. 택시비도 싸다. 차가 막혀서 문제지, 택시비가 비싸서 택시를 못 타는 건 말이 안 될 정도다. 결국 내가 태국을 좋아하는 게 물가가 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반박할 수가 없다.


  흔히 태국을 비롯한 몇몇 동남아 나라들을 여행할 때 ‘힐링여행’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물가와 무관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연도 있고, 유적지도 있고 뭐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휴양이든 힐링이든 동남아에서 즐길 수 있는 ‘여유’는 단순히 시간만 뜻하는 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뉴욕 여행이 정말 별로였다. 몇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돈 때문이었다. 경비가 넉넉하지 않아 고급 식당엔 갈 수 없었고, 동네 슈퍼마켓의 샐러드바에서 음식을 사 와 숙소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은 기본적으로 100불 이상이었기 때문에 두 번 이상 보는 걸 포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몇 개의 사치는, 하루에 단 한 번, 그나마 비싸지 않은 식당 중 괜찮은 식당을 하나 골라가고 커피를 마시는 것 정도였다. 그럭저럭 좋은 기억도 있지만 포기한 것이 더 많았다. 즐거움보다 아쉬움이 더 많은 여행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여행할 때, 여행하는 나라의 물가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당장 ‘미국 여행’만 포털 사이트에 치면, ‘미국 2주 여행 비용’, ‘미국 동부 여행 경비’, ‘미국 여행 식비’, ‘미국 일주일 경비’ 등이 줄줄이 뜬다. 유럽 여행을 쳐도 마찬가지다.


  대학 시절 알바한 쌈짓돈을 모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백 번쯤 고민하다 결국 패러글라이딩을 안 하기로 마음먹었던 건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고, 터키 여행에서도 세계 3대 패러글라이딩 명소라는 페티예를 그냥 지나쳐야 했던 것도 후회된다. 처음 바르셀로나를 갔을 때, 가우디가 지은 저택 입장료가 비싸단 생각에 고르고 골라 카사바트요만 들어갔던 것도 다시 바르셀로나에 갈 때까지 한이 됐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글에서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라고 했지만, 일단 여행을 떠난 이상 돈이 없어도 여행은 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 적확하게 말하면 여행은 할 수 있다. 하지만 100% ‘후회 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는 없다. 최소비용으로 해야 하는 여행은 즐겁지 않다. 속물적이라면 속물적이지만, 여행은 이미 ‘산업’이고,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여행 소비자’에 가깝다.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 간혹 어떤 여행자들은 노숙까지 여행의 전리품처럼 자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유가 있으면 더 즐거울 수 있는 게 여행이다. 물가가 비싸 우아한 식사 대신 바게트 샌드위치로 식사를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다. 겉에서만 훑어보는 것? 겉도 멋있지만 내부를 보지 않는 게 다 감상한 건가? 재밌어 보이는 액티비티를 못하거나 신중하게 골라야 하는 것도 싫다. 기념품을 살 때도 ‘제일 예쁜 것’, ‘제일 마음에 드는 것’ 대신 가격 대비 괜찮은 걸 골라야 하는 것도 싫다. 평소라면 그럭저럭 기준을 세워놓고 그 안에서 적당히 타협이 가능하지만 여행은 그럴 수가 없다. 다음이 또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여행의 ‘감흥’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경비에 맞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게 우선이라는 소리다. 유럽행 비행기와 숙소비만 간신히 있다면 유럽으로 떠나는 대신 물가가 상대적으로 유럽보다 싸고, 비행기나 숙소비를 아낄 수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쪽이 훨씬 더 여행은 즐거울 수 있다. 무조건 MoMa에 가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봐야 한다거나 루브르에 가 <모나리자>를 보고 오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그걸 즐길 수 있게 경비를 더 모아야 하고.


  무조건 물가가 비싼 나라로 여행을 가지 말란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싼 나라로 여행 가는 게 좋다는 말도 아니다. 그럼 돈 많은 사람이 여행 가면 즐겁겠네?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태국 여행이 좋은 이유가 물가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한데, 물가가 이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왠지 나는 내가 싫어지는 거다. 물론 그 여행도.   내가 가진 돈으로 더 여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래서 내가 즐겁다는 게, 결국은 태국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에 기대어 있고, ‘여행=돈’이라는 걸 온몸으로 말하는 기분일 때 너무 싫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심지어 거기다 ‘여유’, ‘힐링’, ‘명상’ 그런 수식어를 덧붙인 여행이면 더더욱.


  뭐 내가 거창하게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며 진정성을 추구하는 여행자는 아니지만, 가끔 방콕이 너무 좋다고 말할 때마다 속이 뜨끔거리는 건 그래서다. 물론 이렇게 쓰는 지금도 방콕의 좋은 호텔에 가서 수영도 하고, 거품 목욕도 하고, 61층 루프탑바에 가서 야경을 보고, 탄 생츄어리 스파에 가서 몸도 풀고 그러고 싶다. 나는 정말 방콕이라는 도시를, 좋아하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빡빡한 일정과 피로한 감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