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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옷 Jun 03. 2019

결심만 잘하지

여행이 주는 ‘성취감’은 일상과 연결되지 않는다







나는 정말 인생에 열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사람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행 중에는 ‘돌아가면 ○○ 해야지’라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그렇듯이 나도 매번 ‘돌아가면 이번엔 정말 영어 배운다’라거나 ‘어차피 못하는 영어 대신 중국어를 배워볼까’ 같은 생각,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림에 소질은 없지만, 취미 미술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기타를 메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멋있어서 기타를 배웠지만 짐 때문에 무거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타 대신 우쿨렐레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까지 아무튼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결심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여행 중에 겪었던 모든 경험이 내게는 하나의 소설적 영감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통찰력 같은 걸 얻은 느낌도 들었다. 돌아가면 ‘A라는 주제에 대한 소설을 쓸 거야’라든가 ‘B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을 써보는 건 어떨까’라든가 ‘C에 대한 소설들에 대한 평론을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었다. 물론 당장은 여행을 하느라 바쁘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그니까 정말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이런 걸 해야지, 하는 생각이 기분 좋게 나를 들뜨게 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결심은 한국에 돌아오면 보기 좋게 내팽개쳐졌다. 아아, 맞아, 그거 하기로 했었는데... 했었지... 맞아.. 했었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게 없었다. 돌아와서 한 번도 영어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아무튼 간에 뭔가 결심했던 것들을 한 적이......... 없다.


왜 여행지에서 나는 이렇게 결심중독(?)처럼 수많은 결심을 하게 되나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여행을 하면서 얻게 되는 착실한 성취감과 충족감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시간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나가는 일. 아침을 먹고, 두 발로 가려던 곳까지 차곡차곡 가는 일들. 사실 여행은 이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인데, 계획대로 잘 이루어졌으면 그만큼 완벽한 날이 어디 있을까.


꽤 괜찮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길도 잃어버리지 않고 목적지에 한 방에 도착했다면, 예상한 시간에 맞춰 버스가 와준 덕에 착착 잘 맞춰 구경하고, 커피 한 잔까지 느긋하게 마셨다면, 여행에서 더한 성공은 없다.


그 착실한 성취감들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나를 들뜨게 만들고, 어딘가로 떠민다. 한국에 돌아가도 나는 착실하게 해낼 수 있을 거야. 이런 기세라면 할 수 있어. 하지만 결심은 한국에 돌아와 실패와 좌절을 겪지도 못한다. 왜냐면 안 하니까.


진짜 결심을 했던 걸 이루는 소수의 사람은, 양심껏 고백해보자. 그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서 실천력이 높아진 걸까? 그 사람들은 여행을 가지 않았어도 애초에 하려면 하려던 사람들이었을 거다.


나는 오히려 결심과 반복적인 포기...가 아니라 ‘시도조차 안 함’ 인간이다. 이젠 뭘 해야겠다는 결심도 세우지 않는다. 풍경은 풍경 그 자체로만 내게 남고, 여행은 그저 소비 중 하나라는 것을 깔끔하게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 시간과 돈을 썼는데, 거기 다녀와서 ‘이거’ 하자고 마음먹었잖아,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정말 ‘버리는’ 시간과 돈이 아니고 싶었으니까. 나는 무언가 ‘깨닫고’ 돌아온 사람이고 싶었다.


오히려 돌이켜보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우연히 내게 ‘빈 시간’이 주어져 여행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었을 때, 그때 나는 여행에서 깨달았던 것들을 천천히 정리하고, 그때의 결심 중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다시 떠올려 봤던 것도 같다. 그건 아마 여행이 주는 경험이 아니라, 고요히 내게 집중한 시간이 주는 것이었을 거다.


우리의 인생을 만드는 건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경험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정말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약하며) 사서’ 하기만 한 여행은 ‘경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경험은 매일 같이 하는 것 아닌가? 의미부여 없이 지나가는 수많은 경험들이 하루이틀 그렇게 일주일 한 달, 한 계절, 1년이다.


여행의 경험이 통찰력까지 내 손에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목표를 세우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 굳이 여행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야만 ‘깊어지고’ ‘넓어지는’ 그런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여행과 통찰력은 실은 무관한 변수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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