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세미 Apr 25. 2023

흐리고 고요한 좋은 날

흐린 날

 창밖의 하늘이 흐리고 어둡다. 자욱한 먹구름은 울음을 꾹 삼키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 오늘 안에 터질 것 같다. 그렇게 예상하고 작은 핸드백에도 들어갈 법한 초경량  3단 우산을 챙겨본다. 짙은 남색에 아이보리 색의 작은 땡땡이 무늬가 있는 우산이다. 역시 비가 온다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무게나 크기가 부담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챙겨보기로 한다.


 뭘 신어야 할까. 이렇게 흐린 날엔 늘 현관 앞에서 서성이게 된다. 레인부츠를 사야겠다고 마음만 먹은 지도 벌써 몇 해가 흘렀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 초입의 흐린 날에 떠오른다. 레인부츠가 있다면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비가 내린 직후나, 뭘 신어야 할까 하는 고민 없이 그 신발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같이 외출해야하는 직장인도 아니고(물론 작업실에 매일 나가고 있지만) 비 내리는 날에만 신기위한 부츠(물론 패션으로도 신을 수 있겠지만)를 살만큼 비에 젖는 걸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올해도 결국 레인부츠는 장바구니 안에서 유효기일이 지나 사라질 운명에 처할 것이다. 하얀 운동화는 진흙이 튈 수 있으니 탈락. 구두는 물에 닿으면 상하는 가죽이니 탈락. 샌들은 양말이 젖을 게 뻔하니 탈락. 역시 만만한건 검정색 스니커즈다. 


 밖은 흐리고, 약간 춥고,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래로 길게 늘어트리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오전이지만 새벽 같은 분위기에 곧 지구 종말이라도 닥칠 것 마냥 우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난 흐리고 고요한 날이 좋아.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이 환하고 향기롭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넘쳐나는 햇빛 찬란한 어느 날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그래도 상관없어 보이는 차분한 흐린 날이 더 마음이 편하더라고. 이런 내가 이상한 건가?


 마음이 우울한 사람이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고 안타까워하거나 궁금해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 뒤에 혹시 무엇 때문에 마음이 힘드니? 하고 물어봐 줬다면 어떤 말이라도 꺼냈거나 정말 내가 그래서 이런 날을 좋아하는 걸까? 되뇌어봤겠지만. 단정적인 그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로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내가 좋아하는 날의 풍경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런 날엔 부엉이가 생각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이다. 우리 가족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강원도 산골의 작은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뒤에는 동산이 있고 집 앞에는 정원이 있었다. 아빠는 정원 한 편에 연못을 만들어주겠다며 야심차게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것이 생각처럼 간단치는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며칠 만에 포기했다. 대신 그 자리에 방울토마토와 대추나무를 심었다. 우리 집 옆에는 아주 작고 낡은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 날이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그 날은 어쩐 일로 가게 앞에 동네 아이들이 모두 집합해있었다. (그래봤자 대 여섯 명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집 앞에 나와 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무리에 합류했다. 아이들 사이에는 나무 궤짝이 하나 놓여있었고, 그 안에서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엉성한 나무 궤짝이었기에 꽤 큰 나무 틈 사이로 그 안에 새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닭인 줄 알았다. 아니면 기껏해야 꿩이나 오리겠지. “부엉이다.” 슈퍼집 아저씨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부엉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참새나 비둘기, 앵무새는 봤지만 이렇게 크고 신비로운 조류는 본 적이 없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순식간에 아이들을 밀치고 궤짝으로 달려가 나무 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부엉이의 눈을 보고 싶었다. 그 때 부엉이의 눈을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부엉이를 본 어린 시절의 나는 슈퍼집 아저씨에게 제발 부엉이를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아저씨는 털털 웃으며 부엉이를 다시 하늘로 날려 보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밤(그날 이었는지 다른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렸다. 잠에 들지 않았던 나는 벌떡 일어나 창문 밖을 살펴봤다. 부엉이는 보이지 않았다. 날아가는 부엉이 대신 밤하늘 사이 옅게 퍼진 달빛만 보일 뿐. 흐리고 어둡고 추운 밤. 보이진 않지만 슈퍼집 아저씨가 날려 보내 준(거라 믿는) 부엉이가 날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잔뜩 성을 낼 것 같이 벼르고 있는 먹구름 사이를, 천둥 번개가 떨어져도 하나도 두렵지 않다는 듯 멋지고 자유롭게 비행하는 부엉이를.


 툭. 빗방울이 피부 어딘가로 떨어졌다.

 역시 비가 온다. 준비해 온 우산을 펼친다. 바람이 많이 불어, 가볍고 작지만 그만큼 내구성이 약한 초경량 우산이 좀 불안하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본다. 이러다 우산이 뒤집어지면 어떡하지? 또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변덕스러운 비바람에 맞춰 이리 기울였다 저리 기울였다 하는 모습이 춤을 추는 것 같이 느껴져 어이없이 웃어 버렸다. 이렇게 금방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는 건, 오늘이 흐리고 고요한 내가 좋아하는 날이라서.


 먹구름이 낀 밤하늘을 비행하는 부엉이처럼.

 비바람을 뚫고 나아가보기로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