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세미 Apr 26. 2023

흐리고 고요한 좋은 날

사랑받는 나쁜 꿈

 사랑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이 꿈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나 한결같이, 꿈속의 사랑받는 나는 아프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는 갑자기 기절을 하거나, 기운 없어 하거나, 어지러워하는 나를 걱정해주고 보살펴준다. 그러면 꿈속의 나는 무슨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마냥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 이별은 사실 고백이다. 그가 끝내 포기 않고 나를 붙잡아 주길 바라며 던지는 이별. 나를 버리면 네가 더 아플 거야. 협박같은 이별의 고백을 하는 꿈속의 아픈 나는 잔인한 존재가 틀림없다.


 꿈에서 깬 후에는 마음이 울적해진다. 행복하지도 않은 꿈인데 더 꾸고 싶단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꿈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애써 꿈인 척 하는 상상을 하며 꿈의 결말을 지어내본다. 당연히 상상은 꿈보다 생동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내 포기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어 유튜브를 키고 의미 없는 짧은 영상들을 눈으로 좆으며 아침을 맞이한다.


 외롭지도 않은데,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런 꿈을 꾸다니. 욕구불만인가. 아니면 애정결핍인가. 어쩌면 로맨스겹핍?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아니 엄마가 얘기해 줘서, 머릿속에 기억으로 새겨진 어떤 장면이다.


 그건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둘러 등에 업고, 또 다른 아기는 시장바구니를 팔목에 낀 손으로 품에 안고, 남은 손으론 또 다른 아기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30살의 여자, 엄마의 옛날 모습이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서울에서 소위 달동네라 불리는 언덕길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시장을 한번 다녀오기 위해선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와 오르막길을 올라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50kg이 될까 말까했던 한 젊은 여자가 아이를 업고 안고 시장바구니까지 들고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시장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기가 여간 힘들었을 게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의 손을 잡고 걷던 그녀의 세 살짜리 첫째 딸은 그걸 다 알았다. 그래서 엄마가 한숨을 돌리려 멈춰 서서 ‘너도 업어줄까?’ 하고 물었을 때 빙긋 웃으며 ‘나는 걷는 게 더 좋아.’ 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 기억엔 없는-세 살 때의 일이니까-이 일화를 얘기하며 엄마는 어릴 때부터 너는 참 순한 아이여서 키우기가 쉬웠지. 라고 말했다. 이미 오래 전 지나가버린 옛 추억처럼 흘린 이 이야기지만, 나는 퍽 그 시절의 어린 내가 안쓰러웠나보다.


 아들만 넷인 집의 장남과 결혼한 엄마는 아들을 낳길 원하는 시댁과 아빠의 요구에 나부터 시작해 셋째까지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다. 셋 다 딸이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10년 뒤 다시 시도해 늦둥이 막내를 낳았지만 역시 또 딸이었다. 이때 엄마의 도전은 막을 내렸다.) 27살에 첫 애를 낳았고-그건 나-30살에 애가 셋인 엄마가 된 여자에게 개인적인 일상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다. 그 당시엔 아이를 봐줄 수 있는 다른 식구도 없었을 뿐더러(외가댁은 먼 지방에 있었고, 시댁은 손주가 아닌 큰 며느리의 여자애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아빠 역시 사랑을 줄줄도, 아이를 보살필 줄도 모르는 남자였다. 세 딸의 육아는 오로지 30살짜리 여자, 엄마 혼자의 몫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엄마가 꽤나 긍정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바로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는 타입, 그러니까 미래보단 현재에 집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미션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처럼 어떻게든 육아를 잘 해내었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세 딸에게 백화점에서 산 옷을 사 입혀줬고, 생일 같은 이벤트가 없는 날에도 인형을 사주거나 케이크를 사줬다. 학교에 가져갈 도시락을 정성껏 싸주고-심지어 편지도 들어있었다-누구 하나 편애를 느끼지 않도록 고루 사랑을 주고 보살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딸로 태어난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분위기에 압도  당했다. 엄마와 아빠의 기분을 살피고, 거의 모든 순간에 눈치를 봤다. 동생들이 싸우면 중재하지 못해 안달을 내고, 엄마와 아빠, 동생들의 기분을 통제하고 싶어 했다. 집 안에서 나는 가장 -감정적으로-연약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통제하는- 강한 존재였다. 자연히 보살핌을 받기 위해 투정을 부리거나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일 따윈 없었다.


 한번은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책갈피로 쓸 예쁜 단풍잎을 줍기 위해 집 뒤에 있는 동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동생들과 한참 단풍잎을 줍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바위위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쓸쓸하다는 게 뭔지 알지도 못했을-대 여섯 살의-내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은 걸 보면 아마 그 순간 확실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엄마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불행을 더하는 존재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세월이 지나, 나는 사랑받는 나쁜 꿈을 꾼다.

꿈속의 연약한 나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길 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무기로 그 사람의 마음을 짓밟는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그 꿈을 더 꾸고 싶어 한다. 잔인할지언정 더 사랑받고 싶어서.


꿈이니까 어차피 상관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