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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Sep 29. 2020

네이트 온 좀 켜봐.

사춘기가 되자 그 온순하던 딸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과묵하고 생각이 깊은 딸은 무슨 불만이 있는지 전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여느 중학생들이 그러하듯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당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학원을 모두 그만두고 혼자 공부해보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였다. 몇 번의 설득과 회유는 소용이 없었다. 예상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성적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그분이 오셨구나.     


중 2병.     


인터넷이나 엄마들 카페에 가서 주워들은 경험담을 보고 나도 대화를 시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새 핸드폰으로 바꿔줄까?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무엇이 먹고 싶니? 

친구들을 데려와 집에서 파자마 파티 할래?     


난공불락의 성(城)처럼 굳게 닫혀있는 그녀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후 수업을 하던 어느 날,

유독 수다쟁이들이 많은 반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가

문득 ‘너희들의 속마음을 보여줘!’하고 SOS를 쳤다.     


“ 너희들, 집에 있으면 학교에 있을 때랑 다른 모습이지?”

“ 그럼요, 일단 집에 가면 방에 들어가서 안 나와요.”

“ 아...자꾸 뭘 좀 안 물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점심때 급식 먹지 뭘 먹어요? 근데... 맨날 엄마는 오늘 뭘 먹었냐고 물어봐요.”

“ 엄마들이 제발 감시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과일을 갖다주려면 과일만 갖다주지 내 컴퓨터 화면을 왜 들여다보는 거예요?"

“아 놔...내 일기 좀 훔쳐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왜 남의 일기를 훔쳐보냐고요!”     


남의 일기라니...

남이라니!

네가 ‘남’이었구나!     


“그러면 그냥 너희가 문 닫아걸고 들어갔으니, 뭘 하든 말든 신경 하나도 안 쓰면 되는 거야?”

“아....그건 또 아니죠...그건 방치잖아요. 그래도 먹을 것 해주시고 신경 써주시는 게 필요해요.”

“아니..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저희를 그냥 놔두셨으면 좋겠지만. 또 신경도 쓰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의 집 ‘남’들을 통해 우리 집 ‘남’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로 어려운 일이 중2병에 걸린 사춘기 자녀를 건드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놔두면서도 신경을 쓰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의 네이트 온 상륙작전은 그리 시작되었다.   

  

유독 까칠하게 굴던 날, 아이에게 네이트 온 메신저를 켜라고 말을 걸었다.

목소리로 전달했더라면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메신저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원천 차단해 버렸다. 오로지 텍스트로만 전달하는 대화를 시작하였다. 감정을 최대한 빼려고 하니 나의 단어 선택도 최대한 중립적인 단어들로 선택되었고, 문장도 온건해졌다. 내 자식이 아니라 타자(他者)로 여겨지며, 내용에 핵심을 두는 라이팅(writing) 특성상 나의 요점이 오히려 간결해졌다.  

   

아이는 거의 1년 만에 진실한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엄마,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 엄마는 나를 그냥 놔두고 최대한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아이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리 외쳤건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성장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것은 정작 엄마인 나 자신이었다. 아이는 아동기를 벗어나 자아를 부모에게서 독립시키며 차분하게 자신의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타고 있었다.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데 왜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던가. 겉으로 말은 안 했으니 아이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함께 24시간 생활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엄마의 생각을 전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런 내가 오히려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닌가!     


아이는 독립된 인격체다. 

그 말을 책에서나 본 것이었지 직접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려놓자. 

진심으로 아이의 성장을 기대하고 응원해 주되, 

아이가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는 순간을 허용해 주자.    

 

부모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은 크게 방황하거나 엇나가지 않는다. 내가 정한 대로 클 의무도 없다. 이미 자식은 태어나서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순간 진정한 자아를 찾는 ‘남’이 되는 것이니 사회 생활하듯 대하는 게 방법이다. 제안하고 의견을 구하고 동의 여부를 확인한다. 설득할 것인지 그냥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설득될 건지 그저 토론과 합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토론의 품격과 질을 높이기 위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많아지고 더욱 논리적이 되는 아이에게 밀리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아이가 보는 책을 함께 읽었다. 학교 숙제라고 내준 것에는 국부론이니 무슨 논리학이니... 정말 우리 어릴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중학생이 이렇게 어려운 책을 봐야 하다니. 책을 읽다가 내 머리가 다시 좋아질 지경이었다. 아이가 대하는 음악, 유행, 트렌드를 그냥 함께 하였다. 좋다 나쁘다의 판단을 배제하고 그냥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중립의 이해와 수용이었다.     

 

엄마가 뭘 알아. 엄마는 몰라도 돼. 어차피 말해봐야 못 알아들을 텐데 뭘.     

 

학교의 학생들을 면담하다가 자신들의 엄마를 비판하는 말에서 많이 듣던 경고였다. 나는 명색이 교사인데 자기 자식하고도 말이 안 통하는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밀레니엄 세대이다. 어릴 적에 주야장천 듣던 ‘국산품 애용’이나 ‘혼‧분식의 날’이라며 도시락 속의 보리쌀 혼식을 검사받는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직업병인지 엄마의 모정인지 경계가 모호한 채로, 아이 옆에서 그저 사춘기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로 묵묵히 달렸다.     




어느 날 아이에게서 “엄마는 내 친구 엄마들보다 더 젊은 것 같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고개 들어보니 내 눈앞에 활짝 웃는 대학생이 보였다. 아이의 성장을 돕는다고 시작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나를 성장시킨 여정이었다.      


이렇게 부모는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

그것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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