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선정성 뒤에 숨어 있는 박찬욱 영화의 진짜 집요함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질척이는 좋아함’에서 찾았다.
박찬욱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 가 온다. 그는 늘 인간의 가장 깊고 어두운 감정을 스크린 위로 끌어올려 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이번엔 얼마나 폭력적이고 선정적일까”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건 또 하나의 감정이다. 질척이는 ‘좋아함’이다.
이 감정을 떠올리면 나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좋아하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는가. 마음이 힘들 땐 이 질문조차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이제 다시 꺼내 본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그냥 인정하면 안 될까. 설령 그것이 자기애의 그림자를 지닌다 해도, 박찬욱의 인물들은 그 마음을 끝까지 붙든다. 그들이 ‘좋아함’을 멈췄다면 올드보이의 설원도, 아가씨의 마지막 선실도 스크린에 없었을 것이다. “단둘만 남는다면 나머지는 무너져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태도. 그의 영화 속 집요하고 변태적인 집착이 묘하게 마음에 든다.
이 감정은 최근 나의 시간과도 겹친다. 나를 좋아해 준 사람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그리고 서로의 마음으로 이어질 뻔했던 스침들. 남은 인연은 없지만, 파괴와 파문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여운은 헤어질 결심의 서래에게서 절정을 맞는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세계마저 잠식시킨 뒤에야 온전해지는 마음.
서래의 한마디는 그 논리를 압축한다.
“한국에서는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이것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가정도, 예의도, 심지어 나 자신도 무너뜨린 뒤에 남는 감정. 금기와 논리를 넘어 도달한 종착지.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거기에 남아 있는 마음.
마침내.
그리고 나는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을, 어디까지 데려가 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