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내게 필요한 것은

by JooH


나는 Can Survivor, 이 단어를 좋아한다. 암에서부터 살아남은 사람. 작년에 나는 갑상선 반절제 수술을 받았다. @nicezizo 와의 22년 겨울 후쿠오카 여행에서 하루 네 번 코피를 쏟고 이상을 느껴 건강검진을 일찍 받은 덕분에 나는 이제 큰 후유증 없이 일상에 임하는 중이다. 아직 술도 입에 안 대고, 이전에 비해 좀 더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지만. 그런데도 즐거움을 즐거움 자체로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해 엔돌핀을 취하는 삶은 나쁘지 않다. 어제는 너무 즐거운 날이었다. 낮에는 마곡에 가서 피자 한 조각을, 조금 더 걸어서 그저 내게 필요한 것은 즐거움뿐이다.
와인 샵 구경을, 거기서 조금 더 걸어서 커피 한잔을 나누었다. 볕을 쏘이고, 강아지를 쓰다듬고, 말이 잘 맞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의 즐거움, 그저 좋았다.

저녁에는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와인에 빠져 들었다. 삼키지 않았지만 머금어 즐거워지는 맛의 나눔, 국가와 품종과 맛과 향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자리를 통해 조금 더 본질적으로 내가 원하던 모임의 방향이 이런 쪽이었구나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었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참석한 어느 자리에선 Wine Snob, 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그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듯한 조금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 와린이 그 잡채) 어제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줄줄이 틀려놓고 용감히 오답지를 발표할 때의 기분은 무언가 쑥스럽지만 이 와인 게임 자체가 너무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양가감정이었다. 너무 즐거워서 뿌듯한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쉴 수 있었다.

하나의 주말을 소중히, 하루의 월요일을 또 소중히 지내다 보면, 어느새 물리적 거리도, 심리적 거리도, 멀어지고 때로는 잊히기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살아간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거기 있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고, 모든 만남과 기회는 너무 소중하다. 언젠가 또 만나 엔돌핀을 나눌 모든 이들과, 잊혔지만 또다시 만나 그때처럼 즐거울 누군가를 생각하며. 월요일 아침도 힘차게 시작해 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