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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Oct 18. 2023

나이 든 여성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

영화 <69세>가 던지는 이중 차별의 문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옷 잘 잆는 예쁜 할머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영화 <69세>의 소재는 파격적입니다. 69세의 여성 효정(예수정 분)이 치료를 받다가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 분)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효정은 며칠 망설이다가 함께 동거 중인 동인(기주봉 분)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중호를 경찰서에 고소합니다.      


그때부터 고통은 시작됩니다. 형사들 피해를 입었다는 효정의 말보다 합의하에 성관계를 나눈 것이라 진술하는 중호를 더 믿는 기색입니다. 형사들은 친절한 태도를 유지면서도 동인을 따로 불러 효정에게 치매 검사를 받게 하도록 권합니다. 효정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것이죠. 동인은 처음에는 형사들의 말에 흔들려 효정의 상태를 의심하다가 다행히 마음을 고쳐먹고 오히려 효정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중호의 구속 영장은 매번 기각됩니다. 거짓말탐지기 검사에서 거짓이 나왔는데도 말이죠. 우리가 흔히 성폭행 사건 관련 뉴스에서 자주 듣는 이유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곧바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 저항의 흔적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범죄 사실이 의심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해집니다. 효정의 나이로 봤을 때 기억력이 의심된다는 점, 그리고 젊은 남성이 나이 많은 여성에게 성폭행을 자행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법원의 설명 자체가 여성이자 노인이라는 신분가진 효정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여실히 설명해 줍니다.     


이런 편견과 성폭행 피해자로서의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던 효정은 잠시 현실을 도피합니다. 동인에게서 떠나와 이전에 간병을 하던 중증환자의 집에 다시 들어가서 일을 하며 숨어 지내죠. 사실 효정의 원래 직업은 간병인입니다. 동인도 간병을 하다가 만났죠. 그런데 효정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일 안 하게 생기셨어요.’ ‘나이 들었는데도 몸매가 참 예뻐요.’ 무심코 던지는 그런 말 자체가 직업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희롱이 될 수 있다는 감수성은 전혀 무시된 채 말이죠. 비슷한 의도로 ‘옷을 참 잘 입으시네요.’라고 말을 하는 형사에게 효정이 대꾸합니다.

“옷 잘 입는다고요? 나이 들어서 옷 잘못 입고 다니면 무시하고 만만하게 봐서 치근대요. 형사님 보시기에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

효정의 이 대사가 여성 노인이 겪는 일상적인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나이들며 이중의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  

미국의 노인의학 전문의 버틀러는 노년이 되면서 겪는 차별을 에이지즘(연령 차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노인을 상대로 공공연한 비난과 편견이 당연시되는 사회적 태도와 편견을 개념화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에이지즘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슈가 되지만 특히 관계 맺기 이전에 나이를 많이 따지고 외모와 건강 지상주의적 사고를 하며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생산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인식이 만연한 우리나라에서 특히 많은 문제가 됩니다. ‘틀딱’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였나요? ‘틀니를 딱딱거린다’는 뜻으로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최근에는 ‘노슬아치’라는 단어도 생겼다고 하네요. 노인과 벼슬아치의 합성어로 ‘나이 드는 것을 벼슬로 생각하는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단어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연령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효정은 형사에게 묻습니다.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그 사람이 구속됐을까요?”

형사는 답을 하지 못하죠.      


현실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이미 심리적으로 심한 상처를 받은 피해자에게 명확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하거나 ‘왜 거부하지 못했냐’고 비난하기도 하고, 가해자와 대질신문을 하게 하는 등 사건 조사 단계에서 이미 2차 가해가 가해지는 경우를 감안한다면 말이죠. 영화 속에서도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경찰은 가혹하게도 중호와 효정의 대질신문을 준비합니다. 물론 효정은 중호의 얼굴을 우연이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거절을 하지요.      


최근에는 여성이 남성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여성이 죄가 없는 남성을 무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성폭력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사회적 편견과도 싸워야 합니다.      


영화는 여성과 노인의 신분이 겹치게 되면 그 편견과 차별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밤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 길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효정이 지나가는 운전자에게 ‘나이 들었으면 죽으라’는 식의 심한 욕설을 듣는 장면, 나이 든 여성이 흔히 택하는 직업인 돌봄 노동자로서 환자에게 추행을 당하는 장면 등이 이 영화의 시선이 머무는 세상의 단면입니다.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를 쓴 저자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애쓰지 않으면, 우리는 변해가는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중략) 편견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다. 늘 무지하고 대개가 적대적이다. (인종이나 성에 대한 편견과 달리) 연령에 대한 편견은 처음에는 자기와 다른 타인에 대한 혐오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바뀐다.”     

에이지즘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살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늙어서 노인이 되니까요. 젊은 시절 내가 혐오하던 노인의 모습을 바로 내가 가지게 된다는 생각에서 자기혐오가 시작됩니다. 그런 면에서 나이 들면서 생기는 신체적, 정신적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와 다른 이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는 젊은이들 뿐 아니라 노인들 스스로도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여성이나 장애인이 나이 들어 느끼는 세상의 이중의 차별은 더욱 심각하지만 일단 세상 모두에게 언젠가는 다가올 시기인 노년에 대한 편견과 혐오부터 걷어내는 것이 그나마 조금씩 인간다운 사회로 진전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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