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발 빠른 회사들은 일찍이 시작하였던 직급 통폐합, 조직 단순화, CO체제뿐 아니라 절대평가에 이르기까지 회사들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느라 마음이 분주하고 바쁩니다. 세대가 바뀌었고, 이제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는 인재가 모이지 않고 도리어 떠나기까지 한다는 조급함이 많은 기성세대 관리자들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아니야. 애들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조심스럽게 전체 팀 회식으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자리를 한 번 만들까 했는데, 팀장님은 역시나 안 되겠다 싶으신가 봅니다.
"그냥 자네가 같이 한 잔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살짝 물어봐. 강요는 하지 말고."
코로나 탓도 있지만, 그 전부터도 다들 회식이 싫다고 해서 회식도 안 해본 지 오래입니다. 물론 일부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이나 나이 지긋한 선배님들과 한 잔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마저도 많이 줄어들었지요.
괜찮습니다. 저도 술자리의 분위기와, 업무 맥락에서만 보던 모습과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에 참여해온 것이지 술 자체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회식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딱히 많이 서운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아침이 되었습니다. 5시 45분에 울린 알람 벨소리를 끄고 일어나 가족들이 자고 있는 집을 조용히 빠져나오는 시간은 오전 6시 15분 정도. 코로나로 인해 자가용을 주로 이용하면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7시 전후로는 도착을 하게 됩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것이지만 양재에 있는 회사는 서울이 딱 막히기 직전에 있어 그나마 자가용 출퇴근이 수월한 편이네요. 업무 시작은 8시부터이지만 아침에 와서 차도 한 잔 하고, 책도 보고, 이러닝도 하며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어, 일찍 온 것을 딱히 손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8시가 거의 다 되어가니 옆자리에 앉는 같은 팀 여자 동료 한 명이 옵니다. 왔지만 인사는 안 합니다. 지척에 있지만 아는 척이나 인사도 없이 그냥 자리에 앉습니다. 고개를 돌려 먼저 인사도 건네 보았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20살 가까이 차이 나는 남자가 옆에 있으니 싫을 만도 하겠다... 그래도 인사는 하는 게 사람 간의 도리가 아닐까?'라며 내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의례 단념했습니다. 저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그녀의 책상 위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말도 하지 마세요'
흔히 책을 안 볼 때는 책상 책꽂이에 꽂아들 놓을 텐데, 이 친구는 책상보면대 위에 전시라도 하듯 표지가 보이게 늘 놓아두고 절대 치우지도 않습니다.
마치, '난 듣고 싶지도 않고, 너와 대화하고 싶지도 않으니, 날 건드리지 말아라'라고 시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자기만의 업무를 하는 그녀는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퇴근 시각이 되면 사라집니다.
둘이 혹시 싸운 거 아니었냐고요?아니요, 저는 올해 초에 처음 이 팀으로 새롭게 전배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평판이 안 좋은 사람 아니냐고요? 글쌔요...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옆자리에 앉는 처음보는 직원들마다 인사도 없는 앉기를 이번이 3명째라면 제가 정말 큰 문제이던지 최근 신입사원들의 마인드가 '나도 건드림 받고 싶지 않듯 남도 건드리지 말자'는 황금률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문이 생기는군요.
그녀가 아직 출근하지 않은 시간...저 책은 인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자리 주인의 굳은 결의를 24시간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참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옛날 방식이 모두 맞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의 개인주의와 간섭받지 않으려는 심리는 거의 권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차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젊디 젊은 20대 초중반. 배울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은 시기의 직장인들이 스스로 쳐놓은 벽에 갇혀 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바른 방법이었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입사 초반에 도제식에 가깝게 엄하게 업무를 가르침 받고, 직장생활과 조직생활에 대해 배우던 시기는 이제 많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수평적인 조직을 선호하다 보니 이제 팀장이 아니면 나머지는 모두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팀원인 회사들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아랫사람으로 보고 업무를 떠넘기거나 시키던 것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조언도 사라졌습니다.
섭섭하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심해지고 이것이 뉴 노멀(New normal)이 될 것입니다. 이제 팀장이 아니면 모두 같은 팀원일 뿐입니다. 팀원은 모두 같은 팀원으로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역량과 능력으로 각자 일하거나 혹은 협업하는 관계이지 상하관계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조언이란 것이 작동할 리가 없습니다. 조언은 수직적 관계에서 아래로 흐르듯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평적인 조직문화에서, 딱히 나보다 더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의 조언이라는 게 받아들여질까요? 같은 팀원인 주제에...?
연차가 높은 사람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한 때는 참 많이도 혼나고, 지적도 받아가며, 현장에서, 술자리에서, 이 사람 저 사람 해주시는 금과옥조같은 조언들을 가슴에 새겨왔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언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제 누군가의 조언과 지적을 받을 위치가 아닌 도리어 조언과 지적을 해줘야 할 만큼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사람들은 나에게 조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판단'만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나의 평판이 되고, 능력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채찍질하고, 혹시 내가 틀린 건 아닐까 의심하고,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사용하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겸손한 시각을 갖추지 못할 경우, 자신의 생각과 기준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방자한 인물이 되어 자멸하는 사람도 꽤 여럿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높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누구도 조언을 해주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누구로부터 조언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판단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아직 채 조직에 대해, 업무에 대해, 직장생활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과 개념이 확립되기 전인 젊은 20~30대인데 개선할 기회나 조언도 없이 판단부터 받다니요? 하지만 이것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습니다. 아~무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그녀에게도, 업무시간에 인스타와 인터넷 쇼핑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 후배님에게도, 온종일 코인과 주식만 바라보다가 똥줄이라도 타는 듯 화장실로 기어들어가 매수와 매도의 줄타기를 대신하고 계신 후배님에게도, 퇴근 후 제작할 유튜브 영상 콘티를 업무시간에 짜고, 어제 올린 영상 조회수 확인과 댓글에 답글을 다느라 업무시간 중에도 바쁘신 후배님에게도, 여긴 희망이 없으니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이직하겠다고 늘 분노에 차 긴급 연차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는 후배님에게도 해주고 싶은 조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이 입사하실 때 보여주었던 기대에 찬 눈빛과 상기된 얼굴, 그리고 기쁨과 설렘에 살짝 떨리던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파랑새를 꿈꾸며 떠나고 싶어 하는, 그러나 떠날 곳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계속 나와야 하는 회사라는 곳도 생각보다 공부하고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여길 떠나게 되더라도 말이죠. 이제 인내심이 바닥난 마음을 추스르고, 이게 마지막이다~생각하고, 평범한 선배의 조언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