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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양로 Nov 22. 2021

X세대의 마지막 조언 (2)

stubbornness, 변화가 더딘 이유

한 부장님의 이야기


내가 입사했던 건 1992년이었다. 명문대를 나온 나에게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이제 와 그 때를 추억하여 무엇하랴마는, 일본에 버블시대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88올림픽 이후라는 극호황시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절에는 수많은 이력서를 놓고 어딜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던 시절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는 대기업에 입사하였고, 한 계열사로 배치되었다. 공무원처럼 무더기로 뽑은 뒤 여러 계열사에 나눠 배치하던 시절이었다.

입사 후 가장 무서운 사람은 과장이었다. 과장은 우리의 모든 업무를 점검하는 사람이었다. 위로 차장도 있고, 부장도 있었지만 차장과 부장은 우리에게 너무 먼 분들이었다. 그리고 차장은 우리와 말도 섞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과장을 깰 지언정 우리를 직접 혼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장님은 거의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일도 하시긴 하지만 대체로 신문을 보거나 거래처나 임원과의 저녁 약속 등이 주요 업무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는 좀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분인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회사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큰 전지를 사다가 궤도에 물려놓고 발표자료를 만들며 밤을 새워본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그림좀 그린다고 칭찬받았던 나의 실력은 전지에 발표자료를 만들 때 여실히 발휘되었다. 특히 학생임원으로 칠판 등에 판서를 많이 해봤는데 그 경험이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다. 이후에 궤도와 전지는 많이 사라지고 3M사에서 나온 OHP를 주로 썼다. 투명필름 위에 매직으로 글을 쓰고 도표를 그리며 임원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인데, 전지에 크게 작업하지 않아도 되니까 참 편했다. 그리고 컴퓨터가 도입되고 아래아 한글을 썼으며 LOTUS123(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전신)과 DBASE3를 쓰며 첨단을 달리는 젊은 대기업 사원으로 으쓱하게 지냈다.

부서 선임이었던 대리님이 과장을 달 차례가 되었다며 승진 시험을 준비하였다. 승진 시험은 정말 너무 오랜만에 하는 진짜 공부같다며 투덜댄다. 대학생 때도 공부는 제대로 한 기억이 없는데 간만에 시험공부라는 것을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나시나보다 싶었다. 그래, 그 때는 그렇게 시험을 봐서 승진하던 때였다.

가끔 임원실 안쪽에서는 큰 소리가 났다. 온갖 욕설도 같이 들렸다. 그럼 그날은 우리도 죽는 날이다. 부장님이 욕을 먹었다는 건 누군가 밑에서 실수를 했을 때이다. 저 방에서 나온 부장님이 조용히 오실 리가 없다. 우리 다 같이 혼이 나 죽던지, 아니면 오늘은 술마시고 죽던지 둘 중 하나, 아니 둘 다 하루에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혼나고 욕먹는 건 그 날 하루만 유효했다. 다음 날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분위기가 연출됐는데, 꼭 가족같다는 생각을 했다. 싸울 때도 있고, 혼날 때도 있고, 같이 웃을 때도 있는 그런 가족 말이다.


"야, 14층 김전무는 보고받다가 열받으면 재떨이도 던지고 따귀도 때리고 구둣발로 쪼인트도 깐다는데 우리 상무님은 그래도 욕만 하고 마시잖냐. 마음은 그래도 따뜻한 분이야."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시는 부장님을 보니 부장님도 적잖이 놀라고 창피하셨나보다 싶다.

가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정말 이 때는 회사가 진짜 가족과 다름 없었다. 부장님이 이사하시는 날, 우리는 모두 함께 이사를 도우러 갔다.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부장님께 도움이 된다는 게 기뻤고, 같이 땀흘리고 일하는 것도 즐거웠다. 나는 대리 때 결혼을 했다. 집들이는 나와 아내가 가장 공들인 순간이었다. 일부러 토요일에 집들이를 했는데, 가족, 친지, 친구들까지 하고나서 회사 사람들까지 하면 집들이가 주말마다 거의 한 달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돌잔치에 회사 동료들이 오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예의였다.

그러다 내가 대리였을 때 IMF가 터졌다. 과장 이상은 모두 희망 퇴직 대상자였다. 사원부터 대리는 다행스럽게도 비켜갔다. 난생 처음 보고 겪는 과정이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가족 같았던 부서원들 중에서도 짐을 싸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 뿐, 떠난 사람들을 동정할 처지도 못되었고, 남은 자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은 희망퇴직은 여러 번 반복되면서 사람들을 솎아냈다. 그 상황에서 난 그저 이 어수선한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회사는 한 동안 계속 어려웠다. 그리고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고, 다른 곳으로 인수되었다. 용케 살아남았던 선배들은 그 때 또 한 무더기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부장이자 팀장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부장. 그 부장이 돼 있는 것이다. 문득 그리웠다. 가끔 방에서 찰진 욕을 해대던 상무님도, 무섭고 어려운 분이었지만 술 좋아하고 배포 좋던 우리 부장님도, 항상 커피를 타서 아침마다 부서원들에게 한 잔씩 건내주던 마음 착한 고졸사원도 그리웠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에게 차 한 잔 타오라는 말도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무어 그리 잘못된 지시란 건 지 모르겠다. 커피 한 잔 타서 상사에게 가져오도록 시키는 것 조차도 못한다면 도대체 이게 무슨 위계질서가 잡힌 조직이란 말인가? 그래 커피 정도는 내가 타먹을 수 있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일은 따로 있다. 회사는 이번 달부터 수평적 조직문화와 소통활성화를 위해 직급을 모두 없애고 서로 아무개 ''으로 호칭을 하자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사람은 모름지기 연차와 경험과 연륜에 맞추어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는 승진제도였다. 그런데 이제 승진이라는 것도 없고 이제는 모두 님으로 부르자고 한다. 내가 지금 팀장이니 망정이지 팀원인데 그렇게 됐다면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저 새파란 것들이 나를 ○○님이라고 부른다고?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오랜 시간 함께 한 김차장 박차장, 아니 이제 김○○님, 박○○님과 함께 한 잔 했다.


"한 잔 하세요 ○○님~"


내가 님의 호칭으로 김차장과 박차장에게 소주를 한 잔씩 따라주었더니 둘이 깔깔대며 말을 잇는다.


"부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직급호칭을 없애다뇨. 회사가 스스로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 아닙니까? 저는 회사가 님으로 부르라고 하건 말건 끝까지 부장님을 부장님이라고 부를 겁니다!"


"이 사람아, 회사가 하라면 해야지, 무슨 말이야? 이제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잖아? 꼰대구만 꼰대! 허허"


나무라듯 한 마디 했지만, 내심 흡족하다. 아직 내 편이 있는 것이다. 그래, 말이 되나 이 상황이?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예의와 범절이 무너지는 이 비통함을 지난 날 나의 선배들이 알면 무어라 하실까? 외국은 수평적이고, 세계적인 기업들은 모두 수평적인 문화라고? 요즘 스타트업 회사들은 젊은 감각으로 무장한 CEO들이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과감한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다고? 그건 걔네들한테 어울리는 말이고, 우린 다르다 이 말씀. 자고로 회사란 위아래가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하고, 사원은 사원답게, 대리는 대리답게, 과장, 차장, 부장은 또 그에 맞는 권위와 위신을 가지고 조직에서 제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그 직급제도가 유지되어온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식회사 NEW기업문화 캠페인>

- PPT작성과 보고를 자제하고, 이제부터는 서술형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세요.

- 전자결재를 적극 활용해주세요. 간단한 보고는 메일로, 문자로, 카톡으로 자유롭고 간단하게 소통해주세요.

- 출퇴근시 부서를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인사하지 말고 주변의 동료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본인의 업무에 집중합니다.

- 연차를 비롯한 휴가는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신청하고 쓰도록 합니다.

- 주40시간 이내에서 코어근무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근로시간은 탄력적으로 조절해 사용하세요.


미쳤다. 회사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이건 회사가 망하자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다름 없는 제도다. 인사팀에 작년에 IT기업 인사출신 경력 기획자가 한 명 왔다더니 그 녀석은 온 회사를 다 망쳐놓을 셈인가? 그 인간이 우리를 미개한 원시인 보듯 하며 감히 계몽이라도 하려는 듯 저런 말도 안되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한 것이 분명하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사각의 틀 안에 함축적으로 내용을 담아 각종 도식과 그래프, 그리고 도형으로 한 눈에 모든 정보를 담아 보고하는 PPT를 이제 쓰지 말라고? 서술형 보고? 무슨 편지를 쓰라는 거야 뭐야? 전자결재? 눈은 침침하고 모니터는 깔끔하게 보이지도 않는데 종이로 인쇄를 해야지 무슨 전자보고야?

그리고, 와 이건 정말 내가 어이가 없네. 팀장에게 감히 문자와 카톡으로 보고를 해? 내가 지들 친구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보고를 하도록 회사는 직원들을 독려까지 하는 거지? 전화로, 목소리로, 지금 있는 상황을 구두로 정확하게 보고하면서 나의 반응과 분위기를 보아가며 상황에 맞게 보고수위를 조절하는 건 하급자의 기본이자 예의이다. 그런데, 뭐 카톡? 문자?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무엇을 물을 지도 모르는데, 일방적으로 아랫사람이 정한 내용을 띡 보내놓고 보고 끝? 이러니 날이 갈수록 새파란 것들이 팀장 알기를 우습게 알지. 연차를 본인이 쓰고 싶을 때 맘대로 쓰라고? 내년부터는 아예 연차에 대해 팀장 결재도 없앨 거라고? 팀원이 출근을 하는 날과 쉬는 날은 팀장인 내가 직접 정하는 것이다. 이걸 직원이 스스로 정한다는 게 말이 돼? 다들 놀고 싶을 때 한 꺼번에 몰리면 소는 누가 키우나? 소는 누가 키워?!! 회사가 망하려고 작정을 했나?

난 못한다. 절대 못해. 이런 식으로 회사의 위계질서와 예의법도가 무너지는 꼴을 두고 볼수만은 없어. 높은 곳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따라서 하라고 말하지만 우리 실장님도 본부장님도 저런 변화를 내심 불편해하실 거야. 이건 분명해.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저런 식으로 일해서 내가 바라보고 있는 윗분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을 자신이 없다고! 나는 이전에 하던 대로 할거야. 친구같은 팀장? 여기는 회사다. 너희는 나를 두려워해야 하는 거야. 내가 모셨던 부장님을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처럼 너희도 나를 두려워해야 하는 게 맞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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