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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Dec 27. 2023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인간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삽십오 년째 나는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1 첫 문장, 첫 주먹에서 느낌이 왔다. 탐색전은 없어.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거야. 나는 시작부터 자기 패를 다 까고 덤비는 복서거든. 자기소개치곤 강렬하다. 첫 문장 이후, 복서는 바로 태세를 바꾼다. 압축기의 붉은색 버튼과 녹색 버튼을 누르는 단순한 스텝을 밟으며 상대 주위를 도는 아웃복서다. ‘나는 누구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서사적 충격에 익숙한 나는 작가가 풀어놓은 상징에 지친다. 이야기를 즐길 줄만 알았지, 이미지의 은유를 포착하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매 장에서 앞의 첫 문장을 반복한다. 어느새 마지막 라운드. 관중들의 함성을 뚫고 한 줄기 메시지가 울린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2 시끄러운 장내에서 오직 복서만 고독하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프라하의 지하실에서 재활용을 위해 폐지를 압축하는 데 평생을 보낸 은둔자 한탸의 일인칭 서술을 담은 소설이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이성적 사고(思考)를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질서를 찾는데 매달렸다. 그 질서는 인간을 진보의 끝자락에 세워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성적 사고를 통해 쌓은 합리적 가치관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완전히 파탄 나버렸다. 자신들이 찬미해 온 가치관의 죽음을 지켜보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3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50년대에 내 지하실은 나치 문학에 파묻혀 있었다. (중략) 나는 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4 영원히 함께 사는 것 외에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는데, 한탸가 사랑했던 집시 여자는 어느 소각로에서 태워져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름을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마음의 상처는 선명한데, 하늘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인간적이지 않다.


“책은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 주었다.”5 한탸는 그 무엇을 파괴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책을 파괴하는 일은 알게 모르게 한탸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그러다 우연히 펼쳐 든 책에서 읽은 문장들은 삶과 소통하는 새로운 언어를 보여주었다. 한번 책에 빠지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6 책은 압축해서 버릴 폐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천사였다.


“너무도 놀라운 글귀들이어서 나는 저 높은 곳의 별이 총총한 하늘 한 자락을 보려고 건물을 배기갱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리고 나면 역겨운 종이 더미와 솜뭉치에 둘러싸인 생쥐 가족들에게로 돌아왔고, 그들을 갈퀴로 찍어 압축통 속에 던져 넣었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7 한탸는 압축기의 붉은색 버튼과 녹색 버튼을 누르는 단순한 반복 속에서 삶의 모순과 진실을 깨달았다.


알게 되면 사람은 행복해진다.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알게 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단순히 버튼만 눌렀던 시절은 이미 치욕이다. 이제는 책 속에서 희망을 찾지 않고서는 삶을 이어갈 수 없다. 알게 되면 불행하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이다.8 이제 한탸는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9


압축기는 아무런 타의가 없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압축통 안에서 뛰어놀던 쥐에게 갑자기 비극이 시작되듯,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10 타의가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의미를 지우고 노자처럼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의미를 찾아 예수처럼 살아야 하는가? 근원으로 후퇴하고, 미래로 전진한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닥치는 순간이면, 근원으로 전진하고 미래로 후퇴도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한다.”11 세상에 한쪽으로만 흐르는 강은 없다.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12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다. 앞길은 영원히 음울한 세계가 이어질 것만 같다. “그렇게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13 그런 마음이 들 때면 하늘은 그 너머에 분명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한 그것이.”14


한탸는 사랑하는 여인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세상을 파괴하고 싶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고 내 영혼에 깃든 도덕률을 능가하는 연민과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한탸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15 방황의 끝은 삶의 떨림을 멈추는 순간일 것이다. 신의 선물인가? 마지막 순간 정신은 맑아진다. 기억은 선명하다. 그녀의 이름, ‘일론카’


#고독 #연민 #보후밀흐라발 #체코 #프라하 #서평 #인간적

    

1. 보후밀 흐라발, 이창실 역, 『너무 시끄러운 고독』(문학동네, 2016), 21쪽

2. 같은 책 110쪽

3. 같은 책 24쪽

4. 같은 책 84쪽

5. 같은 책 12쪽

6. 같은 책 16쪽

7. 같은 책 74쪽

8. 같은 책 70쪽

9. 같은 책 11쪽

10. 같은 책 75쪽

11. 같은 책 69쪽

12. 같은 책 69쪽

13. 같은 책 38쪽

14. 같은 책 85쪽

15. 같은 책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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