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누가 나에게 화살을 날리나?

by 윌마


풀리지 않는 숙제에 며칠을 끙끙거린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눈앞에 드러난 결과에 비해 원인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제시된 선택지에 침묵은 들어있지 않거든요. 그럴 때면 꼭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와요. 그날따라 더 크게 들리죠. 자신은 어두운 미로를 헤매는데 말입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바라봅니다. 바깥은 파릇파릇 태어나는 생명들로 생동합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비집고 올라오는 생명들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꿈을 꿀 수 없는 땅속 어둠은 절망스러운 길이지요. 바동거리는 동안에는 밝음도 웃음도 잔인할 뿐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상황에 맞게 경험에서 터득했던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익숙한 해법으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당황스럽지요. 그제야 어디서부터 일이 어그러졌는지 되짚어갑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죠. 다들 왜 이럴까 싶었는데 풀이 과정도 정답도 모두 바뀌었습니다. 분명 내 탓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탓할 곳이 없습니다. 상황을 부정해 봐야 바뀐 걸 몰랐다는 아픈 자각만 커집니다. 그리고 밀려오는 소외감. 뒤집어 보면 그동안 너무 자신만만했던 겁니다. 마치 내가 완벽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온 것이지요. 시대가 바뀌면 문제도 해법도 정답도 다 바뀌는 것이 순리인데 말입니다. 시간은 결코 친절하지 않은데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정신줄을 붙잡으려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마음은 더 심란해지죠. 일이 벌어지고 나면 더 이상 내가 쓰던 언어는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논리와 이성에 기반한 분석이라는 도구가 나를 재단합니다. 그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철저히 배제되지요.


이건 분명 옆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때문입니다. 아니 오늘따라 눈부신 태양 때문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애꿎은 곳을 지목해 보지만 그건 주위에서 듣고 싶어 하는 이유가 아니에요. 그 순간 우리는 결코 자신일 수 없지만 있는 그대로 자신인 이방인을 만납니다. 나는 이방인입니다. 이제 이방인이 날린 화살은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빛은 어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했지요? 화살에 피 흘릴 때면 주위 어딘가에 서 있을 이방인을 찾아봅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상처 입은 사슴>처럼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회화로 구축한 멕시코의 대표적인 여성 미술가입니다. 칼로는 어린 시절 발생한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됩니다. 열여덟 살 꿈 많은 소녀의 몸은 버스와 기차가 충돌한 사고로 산산이 부서집니다. 침대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칼로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녀가 자화상을 주로 그린 이유는 침대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가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몸의 상처보다 더 결정적인 고통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리베라는 미국 록펠러 센터에 벽화를 그릴만큼 지명도가 높았고, 자본주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록펠러 센터에 레닌 초상을 넣을 만큼 꿋꿋한 인물이었죠. 그는 칼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리베라의 격려를 받으며 칼로는 화가의 길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리베라의 여성 편력과 이어진 칼로의 질투는 고통을 숙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그녀의 그림은 바라보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참혹합니다. 기억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어떤 타협이라도 할 것 같은 아픔입니다. 화살 자국마다 고통스러운 피가 흘러내립니다. 사슴 얼굴을 했더라도 세상은 그녀를 떠올렸을 텐데 칼로는 아픔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양 옆에 선 굵은 나무들은 그녀를 숨겨 주기보다 무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보이는 바다는 해방감을 기대하게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천둥 번개입니다. 어느 한 곳 쉽지 않기에 상처 입은 사슴은 더욱 부각됩니다. 그림 전체를 더듬은 내 시선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빛을 향합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담담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이 그림에서는 시선의 방향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보통 관람자는 그림을 보는 방향에 익숙합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이죠. 칼로는 자신의 얼굴을 사슴의 머리에 그려 넣었고 되려 관람자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봅니다. 화살이 없었다면 평범한 자화상이라고 치부했을 겁니다. 칼로는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누군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관람자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앞에 서 있는 대상이 됩니다. 그림을 그린 칼로 자신도 관람자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칼로는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린 이방인을 찾고 있습니다. 결코 자신일 수 없지만 그대로 자신인 이방인. 화살이 박히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림으로 담아냈던 칼로는 몸은 부서져 고통스러웠지만 살아 있음이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칼로의 자전적 경험은 조지와 오키프와 함께 페미니즘 미술의 싹을 틔운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조지아 오키프가 꽃을 주제로 여성적 이미지를 구축했다면 칼로는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직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50여 점의 자화상에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운 여성상을 회화적으로 구축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칼로의 그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림의 크기입니다. <상처 입은 사슴>은 가로 세로 30 x 22.4cm입니다. 큰 캔버스만을 고집하던 다른 화가와 달리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30cm 크기 정도입니다. 육체의 고통을 약으로 버텨야 했기에 그녀에게는 작은 크기의 그림만 허락되었습니다. 마치 공책에 일기를 쓰듯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행복과 불행 그리고 당시의 생생한 고통을 그리기라는 행위로 기록했습니다.


칼로는 디에고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혁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부서진 척추는 칼로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남편 리베라는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습니다. 질투로 날린 화살은 되돌아와 자신을 향했습니다. 고통스럽지요. 그런데 고통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 소모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악을 써봐도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니 미치고 까무러질 일입니다. 고통과 싸우는 것은 죽음에게 덤비는 것과 다르지 않지요. 칼로는 피 흘리는 사슴으로 고통에 좌절하는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기 몸에 화살을 박아가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림이라는 기록은 고통에 절망하는 동시에 고통에 매몰된 자신을 인식하고 싸우는 과정입니다. 고통으로 인해 벽에 갇힌 자신에게 공감하고 내면과 소통을 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고통받는 자신을 마주하고 보듬고 더 나아가 고통 앞에 당당하게 일어서는 방법을 그림을 통해 체득했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앞에 서 있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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