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1668,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렘브란트는 빛을 훔친 화가로 유명합니다.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 기법으로 극적인 효과를 끌어냈습니다. <야경>으로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렘 반 로이텐부르그의 민방위대>(1642) 그림이 대표적이죠. 어둠 속에 묻혀 사라질 것만 같은 순간은 되려 조명을 받는 작은 공간을 부각해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런데 <돌아온 탕자>에서 빚어낸 빛은 극적이면서 한없이 부드럽기만 합니다. 빛의 알갱이들이 자신의 체온으로 얼어붙은 공간을 따뜻하게 녹이는 것만 같습니다.
부드러운 빛이 흐르는 방향처럼 그림에 담긴 서사는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끝으로 읽어가야 합니다. 시작은 무릎을 꿇은 탕자의 발입니다. 밑창이 다 해진 신발과 굳은살이 박인 발바닥은 돌아온 탕자가 겪은 그간의 시련을 말해줍니다. 작은 아들은 미리 상속받은 재산을 나귀에 싣고 하인을 앞세우고 떠날 때만 해도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의 먹이를 탐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두 손으로 꼬옥 품어줍니다. 두 손의 생김새가 다른 이유는 너그러운 아버지의 손과 온화한 어머니의 손을 함께 그렸기 때문이지요. 두 손이 내려앉은 등은 온갖 세파를 겪은 탕자의 등이면서 상처를 가진 우리 모두의 등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적을 물리친 전승을 기념하는 방식은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권력층의 시선으로 보면 전승이란 승리의 깃발을 세우는 형상이겠지만, 민중의 마음으로 보면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장면일 것입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종교개혁 이전에는 ‘방탕한 아들’에 무게를 둔 그림이 많았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면서 무절제와 낭비에 허덕이는 모습과 돼지우리에서 비루한 처지를 비관한 채 무릎 꿇고 참회하는 그림이지요. 그렇게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바람이면서 한편으로는 민중을 용서를 구하는 수동적 위치로 떨어뜨림으로써 권력층의 지배 구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담겼습니다. 민중이 눈을 뜨기 시작한 종교개혁 이후 방탕한 아들을 묘사하는 관점에 변화가 생깁니다. ‘방탕한 아들’을 강조하는 내용에서 돌아온 탕자의 ‘참회’와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그림이 주를 이룹니다. 민중은 사랑을 말하고 싶었고, 안아주면서 또한 안기고 싶었습니다.
사랑과 참회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림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려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와 동생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형의 존재입니다. 방탕한 생활로 파산한 동생은 물론 묵묵히 아버지의 곁을 지킨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환대를 형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동생은 언젠가 또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에 빠질 것이기에 저 참회는 믿을 수 없고 용서 또한 과분하다는 것이지요. 형의 모습은 생(生)과 정면으로 마주칠 기회를 잃은 채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일상 속의 탕자, 바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꽉 잡은 형의 양손은 ‘참회와 사랑’ 그리고 ‘시기와 질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합니다.
참회보다 더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겁 없이 도전해서도, 무디어지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서도, 힘든데 다른 방법이 없어 강요해서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패배입니다. 자신이 패배한 이유가 오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모질게 몰아붙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겸손해지는 것이고, 겸손해지기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스스로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형의 모습에는 탓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담겼습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였습니다. 고흐는 세상에서 두 명의 화가만이 예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 한 명이 바로 렘브란트입니다. 부유한 귀족들의 초상화는 죄다 렘브란트의 손을 거칠 만큼 명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명성만큼 화려한 생활로 말년에 파산선고를 해야 했고, 아내와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렘브란트는 참회하는 자신은 물론 인간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이해를 빛과 어둠으로 표현했습니다.
알베르 까뮈에게 페스트(지금의 코로나19)는 추상처럼 단조로운 것이었습니다. 보잘것없지만 오히려 무시무시하고, 볼거리가 없지만 오래 지속되는 것이었죠. 까뮈는 페스트와 싸우기 위해서는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소시민들의 성실함을 주문했습니다.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죠.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인내하기를 페스트보다 성실하게 반복하면 됩니다. 행복을 되찾기 위한 단조롭고 꾸준한 노력 말이죠. 코로나19를 견디는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그것은 매번 끝없는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절망적인 노력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추상화해서 그림을 그린다면 동그란 얼굴에 입을 가린 마스크일 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단순화해서 단어 하나로 표현한다면 상실감이겠지요. 상실에서 오는 외로움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페스트라는 추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까지 이해의 대상이었고 누구 한 명 죽게 둘 수 없었다’고 까뮈는 회고합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추상화한다면 감히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고 상실감에 빠진 이들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것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자의 책무입니다. 우리 삶은 무엇으로 완성되는 것일까요? 정답을 알 수 없는 화두이지요. 다만 참회와 용서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렘브란트가 그림에 담고자 했던 회심입니다. 렘브란트가 훔친 빛이 종소리처럼 울러 퍼집니다. 따뜻한 빛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