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千鏡子, 1924~2015)는 대화하다 말고 자주 침묵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했고, 눈동자는 눈앞의 변화에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이었다. 침묵은 그나마 나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삶에 치일 때면, 광주역 앞 뱀집에 앉아 뱀을 스케치했다. 두 살배기 딸과 첫돌이 안된 아들을 남기고 남편은 요절했고, 6·25 전란 통에 여동생마저 폐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천경자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그리면서 징그러워 몸서리쳤다. 고통을 잊으려고 선택한 끔찍한 자극이었다.
천경자는 그때 처음으로 뱀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 뱀의 눈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개구리 새끼의 눈처럼 둥글둥글, 오히려 사랑스러운 인상”이 들었다. 징그럽고 무서우리라 생각했던 그 눈에서 자신이 평생 떨치려고 했던 슬픔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전설의 슬픈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천경자에게 뱀은 분신이었고, 고통은 동행이었다.
천경자는 자신을 투사한 듯한 여인을 자주 그렸다. 그 여인은 바라보는 사람을 한동안 서 있게 만든다. 여인의 눈빛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다. 시선의 방향이 역류하여 자기 내면을 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좀처럼 말이 되지 못해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마음속에 가득했지만, 알지 못했던 감정은 무늬처럼 압축된 그림으로 남아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다. 침묵은 눈앞의 상황을 마음속에 새겨진 그림과 맞추는 묵언의 과정이었다. 천경자는 침묵 속에서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