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치열하게 산다. 일에 중독되면 처음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중독되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다. 목적의식은 희미해지면서 ‘나’는 사라지고 ‘일’만 보인다. 이럴 때면 왜 사나 싶은 마음이 든다. 가끔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멍하게 있고 싶다. 편한 벗과 격의 없이 나누는 대화가 그렇다. 의미가 없는 것이 의미가 되는 순간이지만, 어쩌면 의미를 지우려는 목적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살아 숨 쉬는 동안 인간의 행동은 목적을 향해 의식적으로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만물의 움직임 역시 목적의식 있는 인간의 행동을 닮았다. 극히 단순하고 의식이 없는 미물도 꼭 목적의식이 있는 듯 행동하는 것 같다. 눈앞에 대상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시선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타의(他意)가 없지만 인간은 늘 의식적이다. 그래서일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사람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그저 웃을 뿐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그나마 우문현답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추측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일관성 있고 조리 있게 설명한 사람은 다윈이 처음이었다. 자연선택은 특수한 환경하에서 생존과 번식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개체군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이다. 자연선택은 어떻게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변할 수 있는지, 어떻게 무질서한 원자가 복잡한 패턴으로 모여 인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핵심 논쟁 중 하나는 실제로 자연선택 되는 ‘단위’에 관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실체가 자연선택의 결과로 살아남는 것일까. 개체일까. 종족일까. 종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진화라는 긴 시간을 고려할 때, 지속하려면 작은 단위가 유리하다. 멀리 떠날 때는 봇짐을 가볍게 싸는 법이다.
태초에는 단순함만이 존재했다. 어느 시점에 스스로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가 처음 생겼다. 불가능에 가까운 그 한 번의 시작으로 단순함은 현재의 복잡함에 이르렀다. 오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으로 장수성, 다산성, 복제의 정확성이 필요하다. 생명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인류의 문화에도 진화의 조건에 잘 들어맞는 물건이 있다. 바로 책이다. 사람은 죽지만 책은 장수한다. 인쇄를 통해 엄청난 속도로 자기 복제가 가능하며, 복제는 개량하려는 시도 외에 거의 정확하다. 복제 오류가 진화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오류가 거의 없는 복제는 사멸(死滅)하지 않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인간의 몸에서 책에 비견될 수 있는 가장 낮은 단위는 유전자다. 사람 몸에는 평균 100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존재하고, 각 세포 안에는 46개의 동일 염색체가 들어 있다. 현미경으로 보면 염색체는 기다란 실처럼 보인다. 유전자는 그 실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다. 46권의 염색체라는 책장 안에는 인간의 설계도가 보관되어 있다. 몸을 만든다는 것은 유전자 각각의 기여도를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협력 사업이다. 세포가 복제되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상호참조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간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로서 긴 세대 지속될 수 있는 염색체 물질의 일부다. 유전자의 생존은 자신이 살고 있는 몸, 즉 생존 기계의 효율에 달려있다. 자연선택은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자기 복제자를 선호한다. 선택을 받는 방식은 단순하다. 다른 유전자보다 많으면 그뿐이다. 이 점에서 유전자는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전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경쟁하는 분자 사이에서 자동으로 벌어지는 선택이라는 낡은 과정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반복한다.
자연선택의 과정을 보면 유전자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다. 이타적 유전자는 이기적 유전자를 이길 수 없다. 유전자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강하다. 자연선택은 염색체 일부가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유전자 복합체를 편집하고, 이를 통해 잘 협조하는 유전자를 모아서 가까이 연관된 집단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유전자 모두와 잘 협조하는 유전자는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간혹 개체 수준의 한정된 이타주의를 보이는 것 역시 유전자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수많은 사본의 형태로 존재하는 유전자는 늙지 않는 불멸의 존재다. 개체는 사멸해도 유전자는 안정적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불멸의 코일,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기계다.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 그러나 인간만은 다르지 않을까?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맹목적으로 유전자가 하라는 대로 따르지 않고 유전자의 지배에 반기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외부 변화로부터 유전자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자연선택은 감각 기관, 즉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사건들의 양상을 몸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신호로 바꾸는 장치를 갖춘 동물을 선호했을 것이다. 뇌는 감각 신경이라는 케이블을 통해 감각 기관에 이어져 있고, 운동 신경을 통해 근육을 제어하고 조정한다. 뇌는 주로 근수축의 제어와 조정을 통해서 생존 기계의 성공에 기여한다. 진화 과정에서 발견된 ‘기억’ 기능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까지 고려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생존 기계의 행동에서 가장 뚜렷한 특성의 하나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행동을 유발한 주관적 감정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 즉 바라는 물체를 ‘마음속에 그린 그림’ 또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이 목적성이 생존 기계 중 적어도 사람에게 ‘의식’이라고 불리는 특성을 진화시켰다. 예측불허인 환경에서 예측을 하기 위해 유전자는 학습 능력을 키웠다. 유전자는 학습과 기억을 통해 생존 기계에게 지령을 내린다. ‘불쾌한 것은 다시는 그것을 하지 마라. 좋은 것은 반복하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흥미로운 방법으로 시뮬레이션이 있다.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능력의 진화는 주관적 ‘의식’의 진화를 초래한 듯하다. 의식은 뇌가 세상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어서 그 시뮬레이션 속에 자체 모형을 포함해야 할 정도가 되었을 때 생겨났을 것이다. 다른 말로 ‘자기 인식’이다. 이렇게 ‘자기 인식’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모의 실험할 수 있는 존재다. 유전자는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의식을 진화시킨 인간은 말 그대로 의식적으로 보인다.
인간은 맹목적인 유전자의 이기성에 맞서 최악의 상황에서 자기를 의식화하여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다. 오늘날의 인권과 평등이 보편적 지위를 얻기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특유한 문화 속에 모방의 단위가 될 수 있는 문화적 전달자가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겼고, 이 단위 개념을 밈meme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이것이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실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