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직구였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선명하고 똑 부러지게 들어왔다. 책을 덮고서 한동안 허둥댔다. 정작 미트에서 공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누고 분석해서 구조화하면 뚜렷해지겠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공은 날갯짓할 때 나오는 인분(鱗粉)처럼 내 가까이에 와서 흩어졌다.
분명 별일이었다. 그런데 별일이 아니었다. 나는 호기심에 발을 동동 굴리는 아이이면서 동시에 웬만한 충격에는 꿈적도 하지 않는 무심한 어른이었다. 낯설면서 익숙한 풍경,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책이 전하는 문제 제기에 박수를 보내면서 동시에 책의 본의를 회피하면서 주위 덤불만 두드리는 식이었다. 불편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내게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기제였다.
어제의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미래에서 가져온 듯한 어휘를 쓰는 사람을 이방인처럼 쳐다본다. 이제는 어제의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어휘를 몸에 익히려 하지 않는다. 나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는 책을 읽을 뿐, 책에서 나를 읽지 않는다.
‘書自書我自我’ 글을 글대로 나는 나대로였다. 나는 살면서 어떤 내면을 구축해야겠다는 고민에 인색했다. 삶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이제는 누구도 나의 꿈이 무어냐, 어떤 삶의 지향점을 세우고 사느냐고 묻지 않는다. 입에서 나오는 헛된 말보다, 걸어온 길에서 찾을 수 있는 정직한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갈 날에 기대어 나를 다짐하자면, ‘사람을 향해 낮은 곳에 처하자’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정도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향점이 분명한 사람을 보면 부럽다. 기자이자 작가인 박소영은 동물과 동물권을 인생의 마지막 어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2017년부터 비건 지향인으로 산다. 이 정도로 확신에 찬 사람에게는 질투심마저 느낀다.
『박소영의 해방: 너머의 미술』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주장이 명확하고 논증이 간명하다. 기자의 예리한 시선은 에둘러가지 않고 단번에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머리나 가슴이 아닌 현장에서 손과 발로 쓰는 글이 단순하고 쉬운 법이다. 내가 선명하고 딱 부러지는 글을 선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번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투명하고 단순하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나는 내 글에 자신이 없다. 주위로부터 두괄식으로, 처음을 임팩트 있게 쓰라는 조언을 자주 듣는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쓰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어 쓰는 글이다.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바늘, 그게 나였다. 안개 낀 뿌연 공터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는 과정이 글의 대부분이다. 글은 사람을 닮았다. 내 글을 아끼는 지인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선명한 글’이라며 나를 울컥하게 했다. 그 지인은 직업 기자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가치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권과 평등이 보편성을 얻기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보편적 진리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에 따라 도전을 받으면서 집단의식으로 자리 잡는다. 동물과 동물권은 근미래 인권과 평등처럼 인간의 보편적 진리로 자리 잡을 것이다. 꿈꾸는 미래 뒷면에는 혼자 감내해야 할 고독과 좌절이 숨어 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붉은 색면 앞에서, 시오타 치하루(塩田千春)의 붉은 방 안에서, 애니시 커푸어(Anish Kapoor)의 시뻘건 거대한 구조물 앞에서 박소영은 자신을 만났다고 말한다. 내가 아는 한, 기자는 싸우는 직업이다. 활동가도 마찬가지다. 불합리한 세상의 한 자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문화부’ 기자로서, 동물 구호 활동가로서 투쟁의 연속이었던 일상에서는 사치라며 묻어 두었던 감정이 작품 앞에서 자연스레 드러났을 것이다.
싸우는 사람은 무엇에 분노하는지, 그 분노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 인식이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애매한 감정에 짓눌리지 않는다. 싸움의 부산물인 회한과 연민에서 보다 자유롭다. 자기 인식으로 철저히 무장해도 삶의 과정에서 눈물짓지 않은 사람은 없다. 밤새 약해진 마음을 아침에 다잡는 흔들림의 반복이다. 늦게 깨달았지만 흔들림은 나, 개인에게서 비롯되는 속성은 아니다. 그건 삶에 깃든 보편적 속성이다. 올라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흔들리게 하는 질긴 생물, 그게 삶이다. 나는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싣고 흘러가는 배였다.
내가 ‘나는 누구다’라는 자기 인식에 목말랐던 이유는 하나였다. 자기의 이유로 싸우는 삶은 그나마 견디기에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단호하게 선택했던 삶마저도 까무러칠 만큼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쳐올 때, 그 싸움에서 나는 어떠했던가. 치열한 고민을 거쳐 나를 설득하고 나아가 주위와 사회를 설득했는가. 설득과 타협을 거친 후에 내린 수많은 선택의 합이 바로 자기 삶이다.
냇물은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은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어느 날 삶이라는 운동장에 내던져진 우리는 흘러 흘러 저마다의 바다에 이른다. 아무리 범인(凡人)이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바다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관해난수(觀海難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 것도 함부로 여기지 않는 법이다. 더러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작은 일에 개의치 않는다는 해석이 있는데, 격이 다르다. 바다를 본 사람이라 하여 삶의 본질인 흔들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흔들림의 무게만큼 치열하게 마디를 짓고 일어서야 한다. 큰 것을 말할 때도 작은 것의 치열함을 기억한다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동물권, 기후변화, 지속가능성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지만, 인간 중심주의와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여전히 비극을 양산 중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비극의 한가운데 세우고, 비극을 극대화하는 심리적 충동이 없지 않다. 현대미술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비극이라는 통절한 각성의 순간에도 자신을 가운데 세우고 자기 존재를 강화하려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다. ‘나’, ‘인간’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모든 생명을 주인공 자리에 앉혀야 공감의 반경은 넓어진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책, 한 권의 현대미술 작품, 『박소영의 해방: 너머의 미술』을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