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과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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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론 뮤익 전시가 화제다. 뮤익의 작품은 황당할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극도의 기술적 완성도와 정교한 예술적 표현을 아우르는 그의 작품은 신비롭고 극도로 생생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상상을 뛰어넘는 스케일과 극사실적인 표현으로 조각을 대했던 기존의 인식 틀은 일거에 무너진다. 당혹스러운 충격. 방어선이 무너지고 무장 해제된 나에게 뮤익은 생생한 인간의 감정을 들려준다. 작품에서 우리는 인간의 기억, 몽상, 일상적 경험에 우러난 불안과 연민과 마주한다.
‘마스크 II’, 77 x 188 x 85cm
전시는 대중을 설득하는 과정이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일단 시선을 끌어야 한다. 요즘 전시의 특징 중 하나다. 관심을 끄는데 열을 올리는 모습은 젊은 관람객들도 마찬가지다. 소셜 미디어로 무장한 개인은 저마다 일인(一人) 전시의 주체다. 예쁜 사진을 찍고, 리미티드 굿즈에 긴 줄도 마다하지 않는다. 론 뮤익 전시에 52만 명이 다녀갔다. 단일 전시 최대 기록이다. 최소한 뮤익의 표현 방식은 통했다.
질質이 문文보다 승勝하면 야野하고, 반대로 문文이 질質보다 승勝하면 사史하다고 한다.(質勝文卽野, 文勝質卽史) 질質은 내용이고, 문文은 표현 방식이다. 야野는 거칠다는 뜻으로, 내용의 정당성, 특히 도덕적 우위만을 강조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는 무심한 경우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다. 옳은 말로 지적질이 이어지면 듣는 사람은 질리기 마련이다. 반대로 사史는 사치스럽다는 뜻이다. 내용은 없고 화려한 표현에만 치중한 경우다. 내용과 표현이 잘 조화되어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
공자는 정치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아름다운 옥이 있으면 깊은 곳에 보관하기보다 눈 좋은 상인에게 팔려고 했던 사람이다. 설득력 있는 언변과 온화한 음성과 바른 몸가짐, 확신에 찬 태도는 공자 앞에 서면 설득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작 공자는 현실 정치에서 실패했다. 천하를 돌면서 자신은 좋은 옥이라고 유세했지만, 그 누구도 공자와 국사를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말을 빌리면 공자는 거친 사람이었다.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儒家는 질質과 문文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내용의 정당성, 즉 질에 무게를 두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만큼, 상대를 설득하는 힘 역시 중요하다. 여기서 설득의 수사학, ‘레토릭’이 강조된다. ‘레토릭’은 의미 전달에 효과적인 문장과 어휘를 사용해서 설득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표현 방법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안도현의 ‘연탄재’는 시적 레토릭의 대명사다. ‘연탄재’는 온전히 자신을 태워 세상과 온기를 나눈 사람의 초상이다. 고정된 인식틀을 깨뜨리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이 솟구치게 하는 것. 이처럼 질質을 전달하기 위해 문文을 갈고닦은 사람들이 있다. 종횡가(縱橫家)들이다.
종횡가는 일종의 유세객(遊說客)으로, 중국 전국시대에 활동한 전략적 사상가다. 종횡가라는 호칭은 합종연횡(合縱連橫)이라는 외교정책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종(縱)과 횡(橫)이라는 두 가지 전략을 활용해 약한 국가들이 연합하거나 강한 적국의 동맹을 분열시키는 등 외교와 군사적 책략을 통해 국가 간 세력 균형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어떻게 타인을 설득하고 현실을 변화시킬 것인가. 종횡가들은 도덕이나 진리를 강제하기보다는 상대의 심리와 현실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하여 설득을 통해 소통하는 유세술을 강조했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면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기 마련이다. 같은 말이라도 좋은 그릇에 담아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마음을 열고 소통을 시작한다. 뛰어난 현실 감각, 상대의 마음을 향한 정교한 전략과 수사 능력은 오늘날 예술가가 갖춰야 할 역량이다. 뮤익의 작품은 ‘현실적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뮤익은 관람객들과 관계 맺기에 성공했다. 그래서일까. 뮤익의 작품은 그 어떤 도움말 없이도 충격적인 신비로움을 전달한다는 찬사를 받는다.
‘매스 Mass’
‘유령’
‘치킨/맨’
‘쇼핑하는 여인’
뮤익의 작품들은 “응시”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주인공은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그 시선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 잠든 얼굴은 말이 지워진 진실에 대한 응시.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응시. 위로가 필요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위로도 바라지 않는 모순된 상황에 대한 응시. 아집으로 가득 찬 고집스러운 응시. 독박 육아와 가사 앞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응시. 모두 존재에 눈뜨는 깊은 응시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조각으로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뮤익의 작업은 표면에 집중함으로써 내면을 응시하게 한다.
이쯤에서 뮤익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방 안에 놓인 사물이다.” 작품은 사람처럼 섬세하게 재현됐지만 현실 속 인물이 아니다. 작품 주인공은 그 자리에 놓인 사물에 불과하다. 사물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작품에서 느꼈던 감정은 죄다 ‘나’에게서 비롯되었다. 이건 ‘나’의 서사다. 뮤익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과 통찰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