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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브레드포드, Keep Walking

버려진 것들은 사람들의 삶이 쌓여 만들어낸 지층이다

by 윌마

https://www.newswel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725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동네를 걸어보자. 길가에 버려진 것들은 무엇인가. 그 위에 어떤 문구들이 적혀 있는가. 버려진 것들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이 쌓여 만들어낸 지층일 수 있다. 마크 브래드포드는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흑인과 저소득층이 밀집해 사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그곳 거리의 포스터, 전단지, 신문지 같은 도시의 부산물을 주요 재료로 삼아 회화 작업을 한다. 거리에서 수집한 재료는 ‘버려진 것’이면서 동시에 ‘버려진 사람들의 흔적’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낸다고 한다. 사회의 가장 약한 지점, 즉 약자를 대하는 방식은 사회적 무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급전 대출 전단지는 정상적인 금융 거래가 어려운 계층을 겨냥한 사회적 낙인의 기록이며, 이런 흔적들은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 어떤 언어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어떤 방식으로 돌보고 배제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브래드포드는 이러한 거리의 잔여물들을 겹겹이 쌓고 긁어내고 찢어내는 대형 추상회화를 통해 인종, 계층, 도시 공간 같은 주제들을 탐구해 왔다. 그의 회화는 ‘사회적 추상(Social Abstraction)’이라는 독자적 언어로 동시대 미술의 감각을 확장했다.


〈명백한 운명〉은 미국 도시 개발의 현실과 그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세 개의 캔버스 위에 적힌 “JOHNNY BUYS HOUSES(조니가 집을 삽니다)”라는 문구는 전단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즉시 현금 지급’을 내세워 취약 계층의 주택을 사들이는 투기 자본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제목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19세기 미국이 토착민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했던 이념을 가리키는데, 작가는 이를 오늘날 도시의 부동산 투기 구조와 연결한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2023, 캔버스에 혼합재료


한때 추상회화는 현실 재현의 임무에서 벗어나 회화라는 매체 자체를 탐구하는 길을 택했다. 점·선·면, 색채와 평면성 등 회화의 고유한 속성을 강조했지만, 그 과정에서 예술이 사회와 무관한 ‘자기 내부의 세계’에 머물렀다는 비판 또한 뒤따랐다. 그러나 브래드포드의 사회적 추상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사회 구조의 모순을 시각적 감각으로 드러내는 저항에 가깝다.


그는 회화를 매체로 사용할 뿐, 회화의 고유성에 갇히지 않는다. 그의 추상화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사회적 감각이 담겨 있다. 초기작 ‘엔드페이퍼(Endpaper)’ 연작은 유년 시절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흔히 접했던 반투명 파마 용지를 겹쳐 붙여 만든 작품이다. 브래드포드는 자신 삶의 배경을 회화에서 지우지 않고, 오히려 예술의 언어로, 적극적으로 변환했다. 그의 작업 전반에는 개인적 경험에서 가져온 재료와 언어를 어떻게 추상과 결합할 수 있는지 탐구해 온 궤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마크 브래드포드의 국내 첫 개인전, ‘Mark Bradford: Keep Walking’은 내년 1월 25일까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다.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그는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성장하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경험했고, 30대에 뒤늦게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2021년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선정 등 국제적 명성을 쌓으며 동시대 미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파랑(Blue), 2005, 캔버스에 혼합재료


‘엔드페이퍼(end papers)’ 연작은 작가의 첫 번째 작업이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재학 중 회화의 재료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던 작가는, 유년 시절 미용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파마용 반투명 종이인 파마 용지(end papers)를 작품의 주재료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반투명 용지의 가장자리를 토치로 태워 검게 그을린 테두리를 만든 후, 용지를 캔버스 위에 줄지어 나열하여 격자 구조로 구성된 콜라주 회화를 만들었다.


‘파랑’은 격자 구조를 지도의 형식과 결합하여 추상회화를 도시적 서사의 장으로 확장한 ‘프로토-맵’ 연작에 속한다. 브래드포드는 엔드페이퍼를 겹겹이 덧붙인 표면 위에 파란색 스텐실로 지도 형태를 구현하고, 상단에는 흑백 신문지를 붙여 도시 구역을 형상화했다. 지도라는 시각언어를 통해 거리 위에 새겨진 역사, 이동성, 구조적 불평등을 탐색하며, 도시 구조와 지역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예고한다.


떠오르다(Float), 2019, 혼합재료


‘떠오르다’는 이번 전시의 서막을 여는 작품으로,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대형 설치 작업이다. 브래드포드는 로스앤젤레스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의 부산물들을 긴 띠의 형태로 재단하고 노끈으로 이어 붙여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는 회화적 설치물로 재구성하였다. 작가는 관람객이 작업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하여, 작품을 ‘보는’ 감상을 넘어 ‘걷는’ 행위를 통해 신체적으로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작품을 밟고 지나가는 움직임에 따라 ‘떠오르다’의 표면은 미세하게 변형되며, 이러한 변화 자체는 작업의 일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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