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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눈 Oct 12. 2023

책 좋아하시나요?

 대학원 입학 후 첫 수업에서 도서관에서 길을 잃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서술어를 찾지 못해서 뱉은 말이었다. 첫 수업에 들어가기 전 한참 고민하다가 생각한 표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을 제법 잘 담은 말인가 싶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도서관에서 뭔가 목적을 갖고 책 한 권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책을 구경하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적당히 읽다가 내키는 시간에 떠나는 것. 낭만적이거나, 낭인이거나, 낭만적인 낭인이거나.


 여행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않았던 건 내가 여행이라는 단어에 건실한 취미 활동이라는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목적도 없이 도서관 건물을 이리저리 떠도는 걸 여행이라는 멋진 단어로 표현해도 될까 하는 약간의 성찰의 과정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대학에 속했던 시간 내내 이 제법 한량스러운 취미를 유지했다. 내 신분은 조금씩 바뀌었고 취미도 여러 가지가 생겼다 사라졌다 했지만, 도서관에서 길 잃기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도서관 2층 로비에 길고 큰 소파가 여럿 있어서 학생들은 그 소파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학교에 적을 둔 시절 내내 시간이 비거나 어정쩡하게 남을 때마다 나는 도서관에 갔다. 나만의 아지트라고 하기엔 사람이 많았지만, 꽤 안락하고 포근한 곳이었다. 적당히 귀퉁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으면 등을 기댄 반쯤 누운 자세도 취할 수 있어서 거기서 잠깐 낮잠을 자거나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조용하고, 냉난방 완벽하고, 심지어 돈이 없어도 갈 수 있고!


 소파에 사람이 꽉 차 있으면 3층 구석의 아무도 찾지 않는 창문 바로 옆의 책상이 보통 내 자리였다. 날씨가 좋다면 5층의 커다란 창문 옆의 자리도 좋아했지만, 안타깝게도 외풍이 심한 날에는 굉장히 추워서 자주 이용할 수는 없었다. 5층 창문의 색색깔의 유리가 붙은 창문을 통해 보는 학교의 모습을 좋아했다. 꼭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것만큼 다양한 색깔을 가진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나는 보통 도서관을 놀러가곤 했다. 학점? 뭐 적당히 도서관에 놀러가는 사람의 학점다운 점수였다.


 이제는 학교를 떠난 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종종 학교 도서관은 가곤 한다. 나름대로 언덕 끝에 있는 도서관까지 올라가기 전 짧은 길목에서 숨을 고르고, 계단을 마저 밟는다. 도서관 정문에서 학생증을 찍고 들어가면 3층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3층의 문학 코너에서 책을 훑어보다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뽑아 표지를 살핀다. 제목과 표지가 모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2층으로 가서 육신을 대충 소파에 얹어둔 채 책을 읽는다. 제법 안온한 시간이다.


 누구나 평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 아침 8시, 아무도 등교하지 않은 학교 교실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많은 공원 끝의 벤치일 수도 있고, 햇볕이 잘 드는 마당의 한 구석일 수도 있고, 수많은 친구들과 함께 머무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매우 느리게나마 적기로 했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문득 쉬고 싶어질 때마다 기웃거릴 수 있도록. 사진이나 그림을 넣게 되면 귀찮은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엄청 원망할 것이 뻔하니까, 글자만 남기기로 한다. 모름지기 도서관은 글자의 공간이니까.


 뭐 어쨌거나, 아직은 책 한 권도 없지만, 내 작은 다락방 속 도서관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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