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진눈깨비 / 도종환
누이동생이 죽은 아기를 낳던 날 밤
진눈깨비가 내렸다
영농기계대금이 밀려 보건소 언저리도 못 가보고
먹는 것이 부실하여 성한 몸뚱이로 크지도 못한
손바닥만 한 목숨을 얼어가는 풀뿌리 밑에 묻고
씻기지 않는 새벽 노을을 손에 묻힌 채
처갓집 더부살이 더욱 기 꺾인 매제는
도시락도 없이 재건조장 일을 나갔다
앞브레이크 끊어진 녹 낀 자전거
바퀴를 말없이 굴리며 방고개를 넘어갔다
아버지는 부러 얼어터진 연탄보일러 얘기만 꺼내고
어머니는 연신 머릿수건을 고쳐 쓰고 계셨다
비도 되고 눈도 되며 내리는 것들을
바람은 자꾸 얼리며 오고
언 땅 깊은 곳의 어둠을 퍼올리던 삽 한 자루
흙냄새를 바람에 씻으며 기대 서 있었다
생명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세태에서 힘든 시간을 겪어냈던 옛 시절의 한 장면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누이동생의 죽은 아기를 ‘얼어가는 풀뿌리 밑에 묻’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가뜩이나 심란한 상황에서 진눈깨비를 ‘바람은 자꾸 얼리며 오고’ 어린 생명을 묻어야 했던 삽 한 자루는 마치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인생을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아픔들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플 때마다 통곡하고 오열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에서 보여준 정서처럼 아픈 심정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도시락도 없이 재건조장 일을 나’ 간 기 꺾인 매제처럼 그렇게 현실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절제된 시적 언어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가슴을 저미게 하는 시인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