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끈들의 힘을 믿는다.
8월의 여름은 너무 뜨거웠던 모양인지, 지금에서야 겨우 그때를 추억해본다. 학기 단위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2월 말, 8월 말은 없는 날짜나 마찬가지이다. 학기 내내 해왔던 근로를 마무리하고 기숙사에 있는 모든 짐을 이사하느라 바쁘다. 그러니까 8월의 내가 가졌던 감정은 늘 상실이었다. 잃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한철 애달팠던 것들과의 이별을 끝내면 공허만이 남는다. 어쩌면 채움보다 무거운.
이번 학기는 휴학을 결정했기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 방학 동안 준비한 시험이 다가왔고 2개의 영화제에 참석해야 했다. NeMaf 관객구애단과 시우프 자원활동가로서 말이다.
네마프 후기를 통해 이름을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진심이었다. 성질이 잔뜩 난 여름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상실을 준비해가며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인생은 풀리는 일 하나 없이 어렵기만 했고 영화는 질투 나도록 멋졌으며 글쓰기는 아트나인 활동이 끝난 후 영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뱉은 말이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내인망구타숙(영화 <아가씨>). 네마프와 시우프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상실에서 휘적이는 나를 꼬집어 꺼내줬다. 겹치고 겹친 일정에 마음 속 상실의 파이가 작아졌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상실을 잘 하기 위해 채웠던 시간들에 대해 기록한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만남이 우습게도 한철에 그치질 않기를 간절히 바라다 결국 그것 또한 나의 몫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좋아한다. 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순간을 사랑한다. 영화제의 흐르는 공기, 느리고 강렬한 느낌들-도대체 그게 뭐길래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지. 그 궁금증을 아직 해결하지 못해 영화제를 찾는다.
운 좋게 나는 영화를 하고 싶었기에 가벼운 의무감으로 영화제에 관객이 아닌 다른 이름들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던 관객 심사를 거쳐 시우프에서는 자원활동가가 되었다. 운영팀에 지원한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영화제 돌아가는 꼴이 궁금해서였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면접장에 가서야 내가 생각하는 업무들은 프로그램팀에 있다는 걸 알았다. 속으로는 끙..했지만 면접 짬바(!)로 의연하게 대처했더랬다. 하여튼 그렇게 운영지원, 그 중에서 행사 운영팀이 되었다.
“행사”는 노동력이다. 그건 어느 행사나 마찬가지다. 개막식은 영화제 전체 일정 중 가장 큰 행사이다. 개막식만 잘 마무리하면 그 뒤에는 영화 상영을 주축으로 돌아간다. 휴학생인 탓에 넘치는 게 노동력(시간)이었고 자연스럽게 개막식 준비팀에 들어갔다. 내 역할은 퍼플카펫 사회자 옆에서 스탭분과 함께 카펫 순서를 알리는 일이었다. 설명도 쉬웠고 역할도 쉬웠고 리허설도 쉬웠는데 딱 현장만 쉽지 않았다. 세상에. 카메라가 팡팡 터지고 연예인들이 걸어오며 축제를 알리는데 내가 있는 구역만 숨 막히게 정신 없었다. 손은 기계처럼 큐시트를 마구잡이로 넘기고 뱉지 못하고 ‘언제 끝나요 악악!’만 입 안을 맴돌았다. 김꽃비와 한예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겠다 조금 설렜던 지난날의 나에게 뺨을 치고 싶었을 때, 퍼플카펫이 끝났다.
퍼플카펫이 모두 마무리되어 휑한 의자에 담당 스탭님과 걸터앉았다. 개막 무대가 저 멀리서 펼쳐지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휘몰아쳤던 시간이 그제서야 제 속도를 유지했다. 각자의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칠 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시작이다.
다른 팀들과 다르게 행사운영은 개막식이 끝난 후 주말에 열리는 큰 행사를 위해 또 달려야 했다. 고정된 역할이 없어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때그때 할 일은 넘쳤다. 나는 메가박스에서 관객 이벤트를 진행했다. 상영작 중 관객과 어울리는 영화 캐릭터를 찾아주는 이벤트. 사전 준비가 부족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야 했다. 불안했던 건 개막식 바로 다음 날 왠지 우리 팀의 인원이 확 줄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우리 팀 천사와 함께 만들었다.
이래저래 불려가는 것도 많고 해야 할 일이 매일 다르기도 해서 행사운영 팀원들과 두루두루 친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마지막까지 얼굴도 못 본 팀원들도 있어 아쉬운 맘이 크다;(
이후에는 우리 팀 또 다른 천사와 팀으로 관객 이벤트를 계속 진행했다. 처음부터 쿵짝이 너무 잘 맞아서 엄청 연습한 줄 알겠다며 웃었다. 아무래도 계속 선물을 주는 역할이어서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괜히 행복했다. 나는 역시 외향형 내향인이야! 이러면서.
개막식 후에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딱 중간에 있던 휴가 하루를 보내고 나니 벌써 영화제 끝물이었다. 관객 이벤트에서 폐막식 준비로 바뀐 역할을 얼른 적응해야 했다. 폐막식에는 행사운영팀원들만 투입돼서 더 도란도란(..)했었던 것 같기도. 관객보다 우리가 더 좋아했던 치즈박스를 왕창 찍었고 못다 한 이야기를 잔뜩 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무리수를 뒀다. 폐막식 무대의 동선 관리를 하기로 한 것. 관종으로 보이면 어쩌지 (맞으면서)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들었고 또 속았다(!) 정말 동선만 관리하는 줄 알았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파악해야 한다니. 아니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머리는 차갑게 손은 빠르게 움직여야 했는데 머리는 뜨거워 터져버리고 손은 버퍼링에 걸려버렸다. 어쨌거나 내가 해야 했다.
다행히 무대 위에서 잘 해냈다. 아마도. 개막식보다 차분하게 했으니 됐어. 폐막식 무대 구석에 서 있으며 팀원들과 눈짓을 주고받았던 순간이 좋았다. 개막식을 펼쳐 듯이 폐막식 또한 우리가 닫은 것 같아 벅찼다.
틈틈이 챙겨보던 상영작들. 모두 성공이었지. 폐막작까지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배꽃나래 감독의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어쩜 이름도 폐막식에 딱 걸맞다고 생각했다. 그래,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이곳에서 우리는 시간을 추억으로 쌓았구나.
집에 오는 길이 너무 멀었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감상을 느꼈다. 이것 참 멋진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자원활동가 발대식 때 어렴풋이 지나쳤던 느낌이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반드시 여성영화제여야만 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여성이 있다니. 한 공간에서, 같은 단어를 마음속에 품은 채 함께 살아 숨 쉰다. 시우프를 방문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모양을 2층에서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빨리 저 안으로 합류하고 싶다. 빨리 저 거대한 물결이 만들어 낼 변화를 알리고 싶다. 영화제의 감동과는 별개로 어떤 것이 마음속에 벅차 올랐다. 반드시 여성 영화제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로 이런 질감을 꼽고 싶다.
내가 써온 많은 끄적임에서 여성 영화를 이야기했다. 여성, 영화. 여성 안의 영화와 영화 안의 여성.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할 때, 일어날 수 있다. 속상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더라. 그렇게 온 몸으로 외치는 여성과 영화가 좋다.
또 찾아와주고 (물론 영화 보러 온 거지만) 겸사겸사 내 얼굴도 봐준 당신들! 존재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했어.
메가박스의 문을 열어젖히면 맞닥뜨렸던 에너지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그 에너지의 일부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멋진 경험이었다. 적지 못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함께였다. 주고받았던 눈인사가, 토닥임이, 가벼운 응원의 몸짓에는 이유가 없었다. 하나로 묶어준 그 ‘이유 없음’들이 나를 단단하게 한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느슨한 끈들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