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용크 Apr 12. 2021

단상의 잔상 #1 사용 설명서

대충 뜯은 비닐과 박스 사이에 자리한 사용 설명서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


도시의 불빛들이 남기는 잔상을 좋아한다. 형형색색의 빛 번짐은 도시 안의 피로감이 일렁이다 넘친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고, 보고 있노라면 도시가 가진 번잡스러움과 적막함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도 좋다.
나의 단상들도 잔상을 남긴다. 쓸 수밖에 없는 마음이 넘친 탓에 흐릿하지만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난날의 모습'임은 분명하다. 나에게 떠오르는 많은 단상이 어떤 색의 잔상이 될지 궁금하다.



단상의 잔상 #1 사용 설명서

빳빳한 포장을 뜯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좋아하는 행위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유독 기쁘게 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제품보다도 가장 먼저 눈길을 빼앗겼던 '사용 설명서'이다.


무려 디지털로 강아지를 키울  있다는 닌텐도 DS라는 기기에 매혹된 순간부터 나는 자잘한 전자 기기를  탐냈던 어린이였다. 건전지를 넣으면 작동하는 것들을 좋아했고 커서도 전자사전, PMP 등으로 종목만 옮겼을  전자기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여전했다. 현실감 없는 새하얀 색깔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떨어지는 각진 굴곡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전자기기 자체뿐만 아니라 포장된 사각 박스에 정신을  차렸다. 유독 과대 포장된   하나가 전자기기 포장이라고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어릴 적에는 마냥 근사하게 느껴졌다.


큰 맘먹고  전자기기 박스를 조심히 방안에 들고 와서 경건히 앉는다. 박스를 다소 조심성 없이 뜯다 본품과 충전기를  꺼내 조심히 구석에 놔둔다. 이제부터 나의 언박싱의 하이라이트이다. 대충 뜯은 비닐과 박스 사이에 자리한 사용 설명서 종이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다.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는 순간은 언박싱의 완성이자 전자기기와  사이의 대면식 같은 순서이다. 보통 사용설명서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규격이나 생김새, 적힌 언어는 제품/출신마다 매우 다르다. 어쩔 때는 중국어로만 적힌 사용 설명서에 눈이 흐려지기도, 앞뒷면 포함 고작 2 종이가 4 국어로 꽉꽉  '가성비' 사용 설명서를 만나기도 한다. 특히 폴더폰이 있던 시절에는 휴대폰을 사면 휴대폰 두께만  사용 설명 책을 줬다. 그걸     읽어보며 "충전하는 "  읽은 뒤에야 충전을 해보고 알면서도 "전원 켜는 " 읽지 않고서는 감히 전원을 켜지 않았다.


박스 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그대로 버려지는 다른 이들의 사용 설명서들을 보며 처음으로 나처럼 사용 설명서를 탐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깨달았던  같다.  지금은 환경 문제 등으로 패키징이 간소화되어 이전처럼의 기쁨을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사용 방법이라는 규칙이 정해진 무언가를  때면  사용 설명서를 찾게 된다. 사용 설명서를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처음 만나는 물건에 대한 나만의 예의이자  부탁한다는 무언의 첫인사였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지난 3월부터 매일 카카오 프로젝트 100에서 기록하고 있는 단상들이다. (작업책방 씀과 함께 하는 '매일 기록하는 습관' 기르기 프로젝트이며 각 주제는 작업책방 씀에서 제공했다.)


작가의 이전글 #비정기적_영화_소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