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뜯은 비닐과 박스 사이에 자리한 사용 설명서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
도시의 불빛들이 남기는 잔상을 좋아한다. 형형색색의 빛 번짐은 도시 안의 피로감이 일렁이다 넘친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고, 보고 있노라면 도시가 가진 번잡스러움과 적막함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도 좋다.
나의 단상들도 잔상을 남긴다. 쓸 수밖에 없는 마음이 넘친 탓에 흐릿하지만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난날의 모습'임은 분명하다. 나에게 떠오르는 많은 단상이 어떤 색의 잔상이 될지 궁금하다.
빳빳한 포장을 뜯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좋아하는 행위 중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유독 기쁘게 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제품보다도 가장 먼저 눈길을 빼앗겼던 '사용 설명서'이다.
무려 디지털로 강아지를 키울 수 있다는 닌텐도 DS라는 기기에 매혹된 순간부터 나는 자잘한 전자 기기를 늘 탐냈던 어린이였다. 건전지를 넣으면 작동하는 것들을 좋아했고 커서도 전자사전, PMP 등으로 종목만 옮겼을 뿐 전자기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여전했다. 현실감 없는 새하얀 색깔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잘 떨어지는 각진 굴곡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전자기기 자체뿐만 아니라 포장된 사각 박스에 정신을 못 차렸다. 유독 과대 포장된 것 중 하나가 전자기기 포장이라고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어릴 적에는 마냥 근사하게 느껴졌다.
큰 맘먹고 산 전자기기 박스를 조심히 방안에 들고 와서 경건히 앉는다. 박스를 다소 조심성 없이 뜯다 본품과 충전기를 잘 꺼내 조심히 구석에 놔둔다. 이제부터 나의 언박싱의 하이라이트이다. 대충 뜯은 비닐과 박스 사이에 자리한 사용 설명서 종이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다.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는 순간은 언박싱의 완성이자 전자기기와 나 사이의 대면식 같은 순서이다. 보통 사용설명서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규격이나 생김새, 적힌 언어는 제품/출신마다 매우 다르다. 어쩔 때는 중국어로만 적힌 사용 설명서에 눈이 흐려지기도, 앞뒷면 포함 고작 2면 종이가 4개 국어로 꽉꽉 찬 '가성비' 사용 설명서를 만나기도 한다. 특히 폴더폰이 있던 시절에는 휴대폰을 사면 휴대폰 두께만 한 사용 설명 책을 줬다. 그걸 한 장 한 장 읽어보며 "충전하는 법"을 꼭 읽은 뒤에야 충전을 해보고 알면서도 "전원 켜는 법"을 읽지 않고서는 감히 전원을 켜지 않았다.
박스 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그대로 버려지는 다른 이들의 사용 설명서들을 보며 처음으로 나처럼 사용 설명서를 탐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또 지금은 환경 문제 등으로 패키징이 간소화되어 이전처럼의 기쁨을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사용 방법이라는 규칙이 정해진 무언가를 살 때면 늘 사용 설명서를 찾게 된다. 사용 설명서를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처음 만나는 물건에 대한 나만의 예의이자 잘 부탁한다는 무언의 첫인사였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지난 3월부터 매일 카카오 프로젝트 100에서 기록하고 있는 단상들이다. (작업책방 씀과 함께 하는 '매일 기록하는 습관' 기르기 프로젝트이며 각 주제는 작업책방 씀에서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