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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성 Jan 15. 2020

사느냐 죽느냐, 명분과 실리를 넘어서

남한산성 보고 & 읽고

 남한산성은 영화로 처음 접했다. 크게 기대하고 보진 않았고 '사극풍의 영화이겠거니'라는 생각으로 보았다. 영화로서의 작품성을 넘어서 이 시대에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더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내가 생각해볼 만한, 아니 생각해봐야 할 질문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립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김상헌과 최명길, 최명길과 김상헌. 조선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밀리고 왕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기존의 명나라와의 군주-신하 관계를 저버리고 청에 굴복할 것인가에 대해 김상헌과 최명길, 두 인물은 상반된 주장을 펼친다. 당시 주류의 의사에 합하는 김상헌은 '더욱 심지를 굳게 하여 대의와 명분(명나라와의 약속과 관계)을 지켜야 한다.', '오랑캐에게 굴복하거나 그와 화친할 수는 없다.', '명분을 따라 싸우고 버틴다면 적(청나라)은 물러갈 것이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최명길은 다른 주장을 펼친다. '삶이 죽음보다 가치 있다.', '삶의 길을 택해야 한다.', '지금 삶의 길은 명을 섬기기를 포기하고 청과 화친하는 것이다.', '적이 집어삼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가 기록되었다. 결국 조선은 버터지 못했고, 인조와 민족은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결과론적으로 최명길의 주장이 옳은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면, 그리고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 역사는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받을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남한산성 영화 포스터 (출처: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Popup.nhn?movieCode=150637)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이 무거웠다. 내 입장이 김상헌과 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김상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첫 번째 이미지는 '김상헌은 틀렸다.'이다. 그래서 불편했다.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그와 함께 자신 없음이 내 마음에 들어섰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가치를 쫓는 삶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나 혼자만 생각한다면 김상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임금의 자리라면, 내 결정에 따라 수많은 인생들의 삶이 결정된다면? 나 때문에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언젠가 가장이 되고 아버지가 될 텐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가치를 선택해서 우리 가족이 굶주린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게 된다면? 목숨을 잃는다면. 자신이 없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현실의 요구와 필요를 제쳐두고 사는 길 같았다. 생명 살리고자 하는 길인데 생명을 잃을 것 같았다.



남한산성 책 표지(출처: http://image.yes24.com/momo/TopCate1690/MidCate009/131799800.jpg)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영화는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하지만 영화화 과정에서 각색된 부분이 있었고 영화가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도 많았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분위기를 책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임금이 결국 마지막까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지 못한 이유, 삼전도의 굴욕을 겪기까지 내몰려진 이유를 말이다. 당시 사대부는 대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살기 위해서 하지 못했다.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살기 위해서 말이다. 대의를 거스르는 발언을 하는 순간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생명이 끝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눈 앞에 다가온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책에서는 김상헌만이 죽을 각오를 하고 대의를 지켜야 할 것으로 여긴 것처럼 보인다.



 책을 읽기 전에는 김상헌이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최명길이 오히려 그쪽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삶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대의 속에서 죽을 각오, 진짜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생명이 끊어져도 좋다는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사회의 풍조를 말끔히 걷어내고 두 사람의 태도로만 본다면 둘 다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겠다. 자신이 믿는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당시 주류의 생각이 김상헌의 입장과 같았고, 그중 대개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입장을 취했음을 본다면, 그리고 역사적 결과로 최명길이 죽기로 작정한 길이 진정 삶의 길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이 시점에서 본다면 최명길의 길이 더욱 빛나 보인다.



 이런 최명길의 길이 마치 예수님의 길과 닮아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자신이 먼저 죽으셨던 모습. 당시 사회로부터 배척받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신 모습. 결국엔 우리를 살리는 길은 자신이 낮아지고 죽어야 했던 길임을 보이신 예수님.



 이번 남한산성의 하이라이트는 영화를 본 뒤의 나의 생각과 책을 본 뒤의 나의 생각. 이 상반된 입장, 이 둘의 대립 사이의 간격에 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이 현실을 무시하고 명분만 내세운 길 같아 보이는 관점과 예수를 따르는 길이 죽는 길 같지만 그것이 비로소 진정 살 길이라는 관점. 이 두 관점 사이의 간격. 서로 진정 살고 싶다는 열망과 그 안의 가치와 신념의 행태가 같아서 더더욱 이해될 수 없는 간격. 전자는 예수쟁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고, 후자는 사회를 바라보는 예수쟁이의 시선이다. 이 대립은 마치 빈 종이의 양면이 서로가 자신이 앞면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으나 결코 메워질 수 없는 이 간격. 이 간격이 예수쟁이로 이 세상을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 우리가 결코 메워낼 수 없는 결정적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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