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부게로 <포위>
과거 예술에 전당에서 진행했던 오르셰 전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더 오래전, 프랑스 여행 때 오르셰 갔던 추억도 같이 떠올랐지요. 당시에는 시간의 압박으로 오르셰 미술관을 뛰어다닐 정도로 서둘러봤었는데, 한국에서 열렸던 미술전은 찬찬히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입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개조하면서 탄생했습니다.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설계되지 않은 탓에 실제 방문해보면 매우 커다란 빈 공간(열차 플랫폼 공간)을 물리적으로 나눠 구성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높은 천장 아래 다양한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요. 궁전으로 활용되던 루브르와 달리 그 태생이 대중적인 공간이었던 탓에 오르셰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친숙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고흐, 고갱, 밀레, 드가, 르누아르... 이름만 들어도 대충 알 법 하지요?
오르세 미술관을 포함하여 유럽 근대미술관은 통상적으로 아카데미즘 또는 낭만주의 작품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고전미술이 근대미술로 넘어가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기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던가요? 현대 미술의 복잡한 양상에도 뿌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미술은 곧 이성과 감정에 대한 표현이고, 근대미술의 지평을 열었던 대표 주자가 바로 아카데미즘과 낭만주의지요. 그렇게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첫눈을 사로잡는 작품이 윌리엄 부게로의 <포위>입니다.
이 작품은 비너스가 아기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정말 화려하고 환상적이기까지 해요. 부게로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여인의 모습은 아주 예쁘고 매력적입니다. 보통 관람객이 그의 작품을 보면 정말 잘 그렸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봐도 정말 잘 그렸거든요. 붓질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완벽에 가까운 비율과 구성을 보여줍니다. 아카데미즘 미술의 정점에 닿은 작품이라 할만합니다.
아카데미즘의 기원은 왕립 회화 아카데미와 조각 아카데미가 통합되면서 아카데미 데보자르라는 기관으로 탄생합니다. 왕립 기관이었던 탓에 왕권을 홍보하거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통적 미술관을 강조했지요. 이 교육기관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젊은 화가들은 경쟁률 높은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교육 프로그램은 엄격한 위계가 있었던 터라 성경과 고전을 주제로 한 역사화가 가장 최우선이었습니다. 바로 그 아카데미즘의 정점에 선 인물이 윌리엄 부게로였지요.
그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 표현, 섬세한 끝마무리, 제작의 정확성, 주제의 완벽한 신체 등, 아카데미즘이 추구하던 예술을 완벽히 충족시킨 화가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담았을 뿐 아니라 역동적인 구성 또한 일품입니다. 현시대 작품과 견주어도 섬세함이나 황금비율은 뒤처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회화의 정점을 찍었던 아카데미즘은 이상하게도 그 정신이 계승되지 못합니다. 부게로는 말년에 후학 양성에도 힘썼지만 수 많았던 제자 중에는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는 많지 않지요. 기본기도 탄탄하고 그리스 신화나 성경에 대해서도 해박했으며 회화적 스킬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카데미즘의 대척점에 있던 인상주의는 대충 그린 그림으로 치부받았음에도 미술사의 핵심적인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당연히 도태되었어야 할 근본 없는 미술사조는 현대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반면, 미술의 정석이라고 여겨졌던 아카데미즘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말이죠. 아카데미즘의 부흥과 몰락의 역사를 보면 “도태”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남습니다. 하기사 미술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세상에서 정석이라 일컬어지던 것들이 어느 날 사그라지는 모습을 얼마든지 보지 않던가요?
도태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잘 알다시피 다윈의 이론은 당시의 종교 이념에 대립되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인류의 시작이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원숭이라니 논문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지요. 하지만, 부수적인 논쟁보다 논문의 핵심 주제는 적자생존입니다. 환경에 적응한 동물만이 살아남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시로 풍족한 환경에 안주해버린 모리셔스 섬의 도도새를 말합니다. 도도새는 하늘을 날 필요 없을 만큼 지상에 먹이가 풍족했기에 땅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는 형태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날개는 퇴화되고 커다란 몸집을 가지게 되는 게, 문제는 포르투갈 선원들이 모리셔스 군도에 터전을 삼게 되면서 생깁니다. 육류가 부족했던 그들이 도도새를 마구잡이로 포획하자 모두 멸종하게 된 것 이죠. 날갯짓조차 잃어버린 도도새가 순간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멸종당한 셈입니다.
비슷하게 인간사회에도 도태는 존재합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지요. 우리들도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능동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요. 도태, 실패, 낙오... 같은 단어를 병적으로 기피하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계발을 하며 정진해나가는 건 숙명입니다.
하지만, 저는 꼭 그렇게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도새가 날개를 잃어버린 이유는 진화를 하지 않은 도도새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그 환경 자체의 문제일까요? 환경 그 자체가 개인의 능력을 퇴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개인들은 어떡해야 하나요?
개인도 환경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마치, 큐피드에 둘러싸인 비너스처럼 말이죠. 저마다 고유의 특성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포위된 환경에 적응하게 됩니다. 도도새 역시 주어진 환경에 맞게 나름대로 진화를 했을 겁니다. 문제는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지만, 그 진화의 결과가 혁신인지 도태인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누가 아나요? 커다란 독수리가 모리셔스 섬에 와서 하늘을 나는 도도새를 모두 사냥했으면 날갯짓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진화라는 건, 변화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개성”을 얼마나 더 발전시키는지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모난 돌은 깎여야 합니다. 하지만, 매끈해져 버린 돌들은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나요? 바닷가에 펼쳐진 수많은 조약돌은 예쁘지만 흔합니다. 인간사회도 비슷합니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여 특징 없이 무난해져 버린 것들이 진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모난 돌도 그 개성에 맞게 쓰면 됩니다.
아카데미즘이나 도도새가 사라져 버린 진짜 이유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장점을 희석시킨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선택당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퇴화된 기능을 복구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진화인 것이죠. 오르셰는 흔한 기차역이었지만 넓은 공간과 대중적 특징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처음에는 반대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유일무이한 형태의 미술관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진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용기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어요. 남들과 다른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현대인에게 진화라는 것은 결국, 포위된 환경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 속에서 나의 장점을 확장시킬 줄 아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미 포위되어버린 환경을 용기 있게 떠난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익숙해져 버린 환경에 순응하다 보면 내가 가진 개성도 어느덧 고쳐야 할 단점처럼 생각도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위된 환경이 나의 단점을 부각하거나 장점이 흐려지는 곳에 있다고 느낄 때는 과감하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게 진화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나의 개성을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진화의 비법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몰랐던 도도새는 세상에서 멸종했고 철거 위기에 있던 오르셰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 될 수 있는 법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