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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May 30. 2021

[19C 아카데미즘2] 호의를 베푸는 삶

에이메 모로 <선한 사마리아인>

에이미 모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다고들 합니다. 그럼, 착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보다 더 착한 사람은 어떻게 구분할까요?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그 녀석은 참 착해”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친구는 어떤 특징이 많아서 착하다고 생각할까요?



  세상의 수 많은 미덕 가운데, 호의를 베푸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착함과 가장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포털 연관 검색어는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가 나오더군요.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도 들더군요.


  이 그림은 프랑스에서 활동한 에이미 모로의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작품입니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19세기 중반, 전통적 유화시대에서 사실주의, 라파엘전파, 인상주의 등으로 다각도로 변화되던 시기였습니다. 다만, 그의 스승이자 장인어른이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장 레옹 제롬이었기에 그의 그림도 전형적인 아카데미적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아카데미즘은 천년 넘게 이어져온 미술화법에서 표현하는 방법에서 만큼은 정점에 다다른 화풍이기에 섬세한 붓질, 지적인 주제, 완벽한 구도를 보여주지요. 세심한 그의 붓질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닥친 사람을 도와주는 한 남자의 모습이 생생하면서도 애절하게 보여집니다. 맨발로 위기의 남자를 지탱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더욱 극적이지요.  



  이 그림의 주제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인데, 강도를 만나 죽어가던 사람을 도와주는 장면으로 여관으로 옮겨 치료비까지 지불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다르게 민족과 종교들이 혼합되어 하등민족으로 멸시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위태로운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이 유대인 보다 더 선하다는 것을 비유했습니다. 궁극적으로 호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호의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비슷하게, 후의, 선심, 친절과 같은 단어도 연관되어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뭔가를 건네주는 마음입니다. 돈이든 마음이든 뭔가를 건넨다 것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해야 합니다. 다소 감정적이고 따뜻한 미덕이랄까요?


<연대 의식>


  좀 뜻밖이겠지만, 호의는 연대의식과 관련 깊습니다. 언뜻 상관없을 것 같은 그 둘의 관계는 사실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왜냐하면,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영 어색한 법이지만 공통점이 느껴질 때는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친할머니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하철 행상 할머니를 돕게 되거나, 취향이 비슷한 처음 보는 동호회 사람들에게도 쉽게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말입니다.


  호의의 기반이되는 연대감은 내가 속한 집단이 잘되고자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내 도움으로 가까운 사람이 잘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지요. 스피노자가 말하는 호의가 '개인이 이성에 따라 다른 사람을 도와 그들과 더불어 우정의 끈을 이어두려는 노력'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연대감은 이루었지만 노동단체나 정치조직처럼 그 집단 내에서만 호의를 서로 베푸는 것은 미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익집단의 경우 그 목적 자체가 공동의 선과는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로 인해 전체의 도덕성이 흠집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능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포기하는 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질긴 욕망을 떨쳐내기 위해 수많은 종교인들이 평생에 걸쳐 수행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장의 이익이 눈 앞에 있는데, 그것을 불우한 이웃에게 모두 내놓는 다는 것은 웬만큼 수양이 쌓이지 않고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호의는 집단을 초월하여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때 가능한 것 입니다.


<성인 니콜라스>



  드물지만, 역사상 그런 욕망을 이겨내고 성인으로 추대 받는 인물도 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된 니콜라스 대주교지요. 영어는 니콜라스지만 라틴어는 니콜라우스, 러시아어는 니콜라이, 네덜란드어로는 신터클라스라고 부릅니다.



  그는 터키, 시리아 부근에서 활동하던 성직자였습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일찍 죽게 되자,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지참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처자들에게 몰래 돈을 넣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습니다. 사후, 그의 시신은 미라지역의 성당에 매장되는데 그 성체에서 성유가 흘러나와 병자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그가 묻힌 지역에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자, 전 유럽에 그를 기념하는 성당들이 세워지게 되지요. 이처럼,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호의는 이웃에게 베푸는 아가페적 사랑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호의는 무엇일까요? 도덕경에서는 덕을 쌓음으로써 세상의 등불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덕이라는게 무엇인지, 덕을 쌓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지요.



  논어에서 4가지 부덕(不德)한 마음을 정의합니다. 사사로운 마음, 고집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지요. 이것들이 덕을 쌓는데 경계해야 할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뜻을 가지면 나와 남을 분별하게 되고, 분별하는 생각이 커지면 내 생각을 고집하게 되며, 고집은 집착을 낳고, 집착하는 마음이 커져서 이기적으로 변해버린 마음에 모든 것을 지배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덕이란 공유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이타적인 마음입니다. 이게 바로 호의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요? 호의가 곧 덕을 쌓는 일인 겁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호의라는 미덕은 우리 모두를 위한 미덕입니다. 성 니콜라스가 이룬 사랑의 실천이나, 공자가 말했던 덕을 쌓아 군자에 이르는 경지는 서로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선이라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겠지요. 호의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몹시 궁금해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먼저 지옥을 방문한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지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누렇게 뜨거나 비쩍 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젓가락이었습니다. 그들이 쓰는 젓가락은 모두 1미터가 넘어 음식을 집더라도 입으로 넣을 수 없었지요. 지옥의 삶은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그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젓가락 역시 1미터가 넘는 것들이었지만, 천국 사람들은 모두가 즐거워 보였지요. 찬찬히 살펴보니, 천국 사람들은 자신의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상대방에게 먹여주고 있었던 것 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같은 음식에 같은 식기, 같은 환경을 가졌지만 그 결과는 이렇게 다른 것이지요. 호의는 결국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의지". 그것을 베푸는 "실천". 그로 인한 손해조차 "기쁨”으로 느낄 때, 가능해진다고 생각해요.


  학생시절, 아버지께서는 용돈을 늘 넉넉히 주시면서, "네가 이 돈으로 너를 위해 쓰기보다, 네 친구와 더불어 쓰고, 하나라도 더 사주라는 의미로 주는 것이니 그리 알고 쓰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넉넉히 주심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작은 호의가 더불어 함께하는 우리가 되고, 그로 인한 기쁨은 제게도 복이 된다는 것을요.



  '화향천리행 인덕만년훈'이라는 고사성어처럼,  향기는 천리를 가고, 사람의 덕은 만년을 따뜻합니다.  니콜라스의 선행이 수백 년이 지나서도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호의를 베푸고 사는 이들이 만만한 호구(虎口) 아니라 좋은 호구(好口) 되어 인정받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미덕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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