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정직을 주제로 쓰려니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단, 스스로 정직하게 사느냐고 반문했을 때,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정직함이 무엇인가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도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정직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 정도로 배웠습니다. 공공질서를 위해 강조되는 미덕쯤으로 알았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생각을 해보니 정직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세상을 살면서 나 자신을 속여가며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정직은 비록, 스스로 말한 것이 오류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양심을 두고 자신이 말하는 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내 양심을 가운데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기에 어려운 미덕이지요.
미술사에도 사실대로 그려내는 화풍이 있었습니다. 그림이란 게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17세기 강력한 왕권과 귀족 중심의 낭만주의가 휩쓸던 시대에는 꽤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낭만주의와 아카데미즘은 권력자를 미화시키는 경향이 많았으니까요.
구스타프 쿠르베는 사실주의를 세상으로 이끈 유명한 화가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의식적인 꾸밈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림 속 등장인물은 쿠르베의 후원자 브뤼야스죠. 그의 도움을 받는 화가로서 정성스러운 붓터치를 할 수 있었음에도 평범하디 평범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림의 부재가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자>라는 점입니다. 뒤로 젖혀진 모습과 꼿꼿한 수염이 오히려 후원자를 압도하고 있지요. 브뤼야스의 하인과 충절을 의미하는 강아지가 그를 향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좀 거만하지 않나요?
사실주의는 이후 마네로 이어져 인상주의 탄생의 씨앗이 됩니다. 따라서, 쿠르베는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요. 당시 사람들은 신화 속 영웅이나, 절정의 비너스에 익숙했는데, 그가 그린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큰돈을 주고 휘황 찬란한 초상화를 의뢰한 귀족에게 그저 평범하고 사실적인 모습의 작품을 건네었으니까요.
그의 대표작 <화가의 아틀리에> 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바라보는 이 그림이 왜 위대한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19세기에서는 그 어떠한 미화나 꾸밈없이 아틀리에를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건 일종의 도발이었을 겁니다. 심지어, <세상의 근원> 이라는 작품은 여성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그려냅니다. 당연히 수많은 비판이 쏟아집니다. 왕조차 그의 작품을 찢어버리려고 했으니까요. 호화로운 고객들이 살집 가득한 여성의 누드나, 길거리의 부랑자들의 모습에 감흥을 줄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내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그리겠노라”
이는 프랑스 제2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대중에 뿌리내린 순응주의에 맞서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시대의 혁명가랄까요? 지금은 사실을 사실대로 그린다는 게 당연하지만, 계급사회가 존재하던 당시에 사실대로 그려낸다는 것은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비도덕성을 고발하고, 처절했던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식을 고양하는 일이기도 한 까닭이었습니다.
쿠르베는 남들이 뭐라 하던, 묵묵히 자신의 철학이 담긴 그림을 그립니다. 저는 이 떡갈나무 그림이 쿠르베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사실적이지 않으면서 가장 사실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 그림은 1 세기쯤에 로마의 카이사르에 맞선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유명한 장군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갈리아 부족장으로써 최강의 카이사르 군대에 끝까지 항전했던 용장으로 우람한 떡갈나무로 형상화했지요.
쿠르베도 기득권에게 반기를 들고, 그림으로 시대와 대항했습니다. 그의 꺾이지 않는 신념은 결국 프랑스혁명정부의 일원으로 정치 위원이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파리코뮌은 정부군에 의해 붕괴되고 그는 스위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마치, 로마군에게 처형당한 베르킨게토릭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쿠르베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철학과 화풍은 후세까지 남아, 현대까지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실’적인 그림 속에는 부조리한 사회의 ‘진실’이 담겨있고, 그 안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쿠르베가 세상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봤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자신에게 정직했고 느끼는 대로 그려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정직의 미덕을 따랐기에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겁니다.
슬프게도 인간은 거짓말을 잘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쩌면 책임 회피를 위해서라면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거짓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정직이 침묵을 금하는 게 아니지만, 거짓과 관계하는 침묵을 금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무조건적인 정직 또한 옳은 건 아닙니다. 그건 폭로일 테니까요. 메마른 진실, 증오스러운 진실은 진심이 결여되었다는 면에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따라서, 정직은 양심과 진심이 담겨있을 때에서야 가능합니다. 정직은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헛되게 꿈꿔오던 망상과 부풀려진 자기애를 본래대로 돌려놓지요. 어쩌면, 정직의 끝점에는 용기가 닿아있을 겁니다. 그 용기로 인해 닥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 이니까요.. 그래서, 정직의 결과는 대부분 기대보다 한참을 못 미칩니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현대 세상에 정직은 참 껄끄러운 미덕이지요.
하지만, 긴긴 시간 뒤에 마주할 결과는 지금 당장의 성과보다 훨씬 값질 것이라 믿어요. 맡겨진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감 있게 해낼 때, “신뢰”라는 것이 생깁니다. 바로 신뢰받는 사람이 “전문가”이지요. 그 사람은 결과가 좋든 혹은 나쁘든 개의치 않습니다. 전문가라는 호칭은 정직과 책임감으로 얻는 것이지 실력만으로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번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매번 거짓으로 상황을 대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신뢰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소의 정직함과 성실. 그리고, 자신의 책임에 대한 긍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뿌리를 단단히 뻗습니다. 그렇게 신뢰를 얻으며 성장한 나무는 굵은 기둥을 이루며 무럭무럭 자라고, 찾아오는 여러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가지가 나오며, 마지막 결실은 모두에게 돌아가면서… 비로소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탄생하지요. 마치, 쿠르베의 떡갈나무처럼 말입니다.
정직하게 살고 싶어요.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거짓 영광보다는 참된 긍지가 낫다고 생각해요.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자신을 향한 정직함에서 시작합니다. 스스로 포장하기보다 담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비난하기보다 그가 가진 장점을 인정할 때, 세상은 솔직해질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심이 자리 잡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