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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빛사냥 Apr 25. 2023

[아들생활탐구보고서] - ⑪ 추억

추억은 방울방울

"엄마, 오늘은 가게에서 마지막이니까 우리 하고 싶은거 할래요."


1호,2호와 함께 출근하는 마지막 일요일.

칠판앞으로 달려가 계획표를 빼곡히 적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묵은 책들과 집기들을 하나도 치우지 못한 채 아이들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위해 묵묵히 기다려줬다.


- 엄마랑 공부하기

- 엄마랑 말랑말랑 수업하기

- 바바리헬스꿀주먹하기

- 괴물잡기놀이하기

- 편의점 간식 먹기

- 배드민턴, 탁구, 공넣기 등등



손님이 갑자기 뚝 끊겨버려 적막했던 2020년의 봄. 서점을 가득 채운 건 1호와 2호의 에너지였다.

코로나로 학교를 가지 않아 서점에서 맘껏 탁구도 치고, 배트민턴도 치고, 축구도 했다가 배고프면 편의점 가자고, 그러다 오후 해가 깊게 들어오면 꾸벅꾸벅 졸으며 코로나 시기를 지나왔다.

5월에 학교를 가기 시작했으나 일주일에 한 번 등교였기에 서점을 학교삼아 매일 등교하는 삶이라고나 할까.


유일하게 다니던 축구학원 마저 폐원을 하면서, 나도 더이상 학교를 기다려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엄마 학교를 오픈하였다.

1교시 수학, 2교시 영어, 3교시 체육, 4교시 과학, 5교시 독서!

학생들의 요청으로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자잘한 놀이들이 끼어들면서 제법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1년이 지나고, 또 1년이 지나도 엄마 학교는 계속 진행되었다.


왜냐구?

어린이서점을 찾는 손님은 여전히 뜸했고, 나도 딱히 할게 없었다.

미술은 낙서지~



"엄마, 우리 가게에서 있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1호와 2호는 서점에서의 마지막 날을 색다르게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난 코로나 3년간 있었던 일상의 하루를 보내고 싶어했다.

엄마랑 수업하고, 놀고, 쉬고.

마지막으로 딱 하루만 더.

매일 느껴왔던 기분을 즐기고 싶어했다.

엄마와의 수업이 좋았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 외에는 하지 못했다.

(이제 집에서 더 빡시게 할 거라는 말은 차마...)


* 바바리헬쓰꿀주먹이란?

모든 책상을 길게 붙여서 양쪽에 서고, 한 쪽에서 공을 상대방에게 쳐서 날린다.

그 공을 받으면 공격권 획득하고, 놓치면 상대방이 1점을 얻는다.

1호와 2호가 만든 놀이로 난 게임 중계를 해야 해서 엄청난 말발을 요구한다.


* 공넣기란?

탱탱볼을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우산꽂이 통에 넣는 게임.

변종된 게임방법으로, 뒤로 넣기, 허리 구부려 바지 사이로 던져 넣기, 움직이는 우산꽂이에 넣기등이 있다.

변종 게임을 더 선호하며, 둘이 충분히 놀 수 있어서 나의 쉬는 시간이곤 했는데, 가끔 우산꽂이 들고 왔다 갔다 해달라 해서 귀찮은 게임이다.


* 말랑말랑 수업이란?

음......영재원 창의성 검사 문제집인데 이걸 하면 뇌가 말랑말랑해져서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하니 1호,2호가 붙인 이름이다. 한 줄 제시어가 있고 뒷부분 이야기 꾸미거나, 단순한 도형그림에 자유롭게 덧붙여 새로운 걸 그려보는, 언제고 뻘짓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 재미있어 한다.

1호, 2호의 결과물을 보고 엄마의 마음으로 보면 절대 안되는 시간이라 어느때보다 열린 마음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해가 넘어가고 나서야 우리의 마지막 날이 끝났다.

우리는 그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듯 하루를 마감했다.

말랑이 시간에 1호가 뜻대로 문제가 안풀린다며 울고 짜증내는것 또한 평상시와 똑같았다.

숱한 눈물도 흘리고, 짜증도 내고, 서로 투닥투닥 싸우며 지냈던 시간들이 눈 앞에 슥슥 지나갔다.


그리고, 3월 31일.

가게는 모든 걸 다 토해내고 문을 닫았다.

이렇게나 너는 멀끔했구나.


다음 날, 이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이 낯설었지만,

낯설음을 즐길 여유도 없이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2월부터 대기를 걸었던 친구도 있고 3월에 신청했던 친구들과 함께 독서논술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출근은 우리집 제일 끝 방으로.


0호가 출근을 하고, 1호와 2호가 학교에 가고 집 안 정리를 끝내면 10시에 나의 교실로 출근한다.

작지만 아늑하다.

그간 창고방으로 쓰였던 곳을 새롭게 꾸민거라 교습실을 새로 얻은 것 같다.

한켠에 자리 잡은, 서점에서 가져온 책들이 날 반겨주는 곳.

그곳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새로운 이야기 꿈을 펼쳐나가고 있다.


문득문득.

'이 시간에 서점에서 난 뭐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초보 선생님이라 엄청난 수업준비를 해야겠기에 더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여간해선 교실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다.

학생보다 더 긴장하는 선생님으로 첫 주를 보내고,

또 몰아치는 둘째주 수업에, 본사 교육에 휘몰아 치며 바깥 세상이 벚꽃 천지라는걸 뒤늦게 알았다.


시간은 멈추는 법 없이 잘 흘러간다.

중학교 생활에 본격적으로 접어든 1호는 서점에 가고 싶다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논다. 고학년에 접어든 4학년 2호는 이제서야 학교 생활을 적응했는지 학교가 재미있다고 한다. 학교 끝나고 서점까지 걸어오지 않아도 되서 좋아하는건지, 집에서 엄마 수업하는 동안 실컷 원하는 간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아하는건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생활패턴에 우리 모두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다.  


지난 주, 1호가 불쑥 말을 건넸다.

"엄마, 오늘 국어 시간에 수필쓰기를 했어. 수행평가래."

'아니, 그런것좀 있으면 미리 좀 알려주던가.

명색이 엄마가 독서논술선생님인데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면 입이 아프더냐!'

마음의 소리를 진정시키며 사춘기에 접어든 1호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물어봤다.

"어떤 내용 썼어?"


내 가게는 내 집이다.

  

"선생님이 제목을 A=B다. 이렇게 써야 된대."

그 뒤로 뭐라뭐라 하는 1호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수필 제목만 듣고 눈이 뜨거워졌다.

그 전부터 끓어왔던 열기가, 참고참고 담아왔었던 것이 한꺼번에 나오려 아우성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둘다 말이 없었다.

우리는 아마 같은 추억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추억을 공유 할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고, 행운이다.

이제 앞으로 더 많은 시간들을 함께 하며 재미지게 놀아야지!


새로운 교실에서도 벌써 소중한 추억들이 쌓이고 있다.

선생님네 집에는 컵이 50개 있냐고 묻는 아이도 있고,

격렬한 토론으로 온 집이 시끄러운 적도 있고,

해리포터분위기로 방을 꾸며 달라고 요청하는 아이도 있다.

방울방울 빛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추억이 추억 자체로 좋은건, 그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아닐까.

그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수다 상대가 있기에 더 빛나는.


1호와 2호가 가끔 묻는다.

"다시 서점에 갈 수 있어요?"

"아니. 열쇠를 건물주에게 줬어. 들어갈 열쇠가 없어서 못가."

"그러게 왜 열쇠를 줬어요! 몰래 하나 남겨놓지!"

"몰래 가서 뭐하게?"

"놀게!! 바바리헬스꿀주먹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게"


사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 그 문을 열어본다.

가득 책이 쌓여 있는 풍경이었다가 어느 순간 텅 빈 공간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이제 정말 닫아줘야지.


오늘도 난 제일 끝 방으로 출근한다.

1호와 2호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을 만나러.

이보다 더 설레는 일은 없을 것이다.


4월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사장님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너도 4월에 새로운 모습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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