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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빛사냥 Jul 10. 2024

[아들생활탐구보고서] - ⑫ 무기력

나를 돌아봐, 그대~

  1호가 딱히 그 사건이라고 인정은 하지 않지만,

분명 그전과 후로 1호의 생활태도가 바뀌긴 했다.


  스승의 날이었고, 마침 나도 시간이 돼서 1호의 하교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가는 1호에게 카드를 전달해 학원선생님에게 커피라도 한 잔 드려야겠다 벼르면서.


그런데 학원 시간이 다가와도 소식이 없어 결국 1호에게 전화를 했고,

당황스럽게도 담임선생님이 받으셨다.

체육 시간에 실랑이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장난이, 장난 아니게 되어 한 친구가 1호의 목을 팔로 세게 감싸고. 목에 상처가 났다는 것이다...

둘 다 불러서 자초지종 듣고 사건 경위서를 쓰고 있느라 오늘 좀 늦는다는 말에,

난 알겠습니다. 하고 끊고 멍하니 서 있었다.

-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저녁 늦게 학원까지 다녀온 1호는 경위서를 내밀며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피곤하고 어딘가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한 초점 없는 눈을 뒤로하고 목부터 살폈다.

선명하게 빨간 자국이 칼로 벤 듯 길게 나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천천히 설명하는 1호의 목소리에는 혼란스러움과 상실감, 체념 같은 것이 묻어나 있었다.

화는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1호는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실망감말이다.


  상대 친구는 초등학교 6년 중 3년을 함께 보낸 아이로, 

감정 기복이 심하고 조절을 잘하지 못해 곁에서 놀면 늘 불안 불안한 아이였다. 

초등 2학년때는 선생님께 가위를 던진 적도 있고, 다른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고 했고, 

3학년때는 1호가 다른 애와 짝이 되니까 본인이 1호와 같이 앉아야 한다며 책상을 던지기까지 했었다. 

결국 그 친구를 제지하지 못한 선생님은 1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을 함께 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겪다 보니 1호도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고 그 친구를 대했다고 했다. 


  중2가 되었고, 반이 11개나 되는 학교에서 둘은 또 같은 반이 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친구가 장난 삼아 1호의 목을 몇 번 감아 조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좀 심해서 반 친구들이 나서서 말렸고, 1호가 이 사건을 담임에게 이야기하라고 계속 말했다고 한다.

그냥 넘어가려다가 결국 교무실에 간 1호는, 자기 보다 먼저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자기 논리를 펴고 있는 그 아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둘은 함께 면담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호가 충격을 받은 지점은, 그 아이의 항변이었다.

- 내가 ADHD여서 1호가 다른 애들 대하듯이 하지 않고 특별히 잘해주는 게 기분 나빴어요.


1호는 그 친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에 놀랐고,

자기가 한 호의가 기분 나쁘게 할 수 있구나에 충격을 받았고,

지금까지 나는 그럼 뭘 한 거지?라는 깊은 회의감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 날, 그 친구가 1호에게 사과를 하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고 하지만.

1호는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생애 첫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라 느슨한 시기이기도 했고,

무언가 할 생각도 안 했다.


무기력한 걸음에,

무기력한 눈동자,

무기력한 식욕,

무기력한 몸뚱아리.

몽유병 환자 마냥 하루를 보냈다.


  고구마 100개를 나 혼자 먹다가 요즘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학교 생활도 재미있지만 그냥 그게 끝.

아무것도 할 마음이 안 생긴다며 자기는 좀 더 쉬고 싶다고.


그렇게 5월이 갔고, 6월이 갔다.

그리고 7월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시험이 다가오는데 1도 긴장감과 불안감이 안 생긴다고 1호는 답답해했다.

시험 준비를 해보는 게 어떻겠니 하니까, 

머리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안 생겨서 자기도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당최 그런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뭔가 1호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 각종 동기부여의 말과 힘이 되는 말들을 쏟아냈다.

심지어, 나는 비싸서 먹어보지도 못한 홍삼까지 사다 매일 바쳤다!!


그러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간 1호는 수면으로 올라오는 게 너무 벅찬 일이었고,

자신의 답답함을 어떻게 표출할지 몰라 자기 나름 설명하려다가 결국 울었다.


1호야, 지금 당장 뭘 할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면,

뭘 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대신, 하루에 하나 감사한 일 찾아볼래?


한껏 구겨져 있던 1호가 갑자기 나를 쳐다봤다.


오늘 하루 중에 감사한 일 하나만 생각해 보라고~

엄마는 말야, 

오늘 하루도 우리 네 식구가 모두 저녁에 집에 와서 잠잘 준비 하고 있는 이 순간도 감사해

누구 하나 다친 사람 없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대단한 감사거든.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감사해~

답답할 때 답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야. 

그런 거 하나씩만 떠올려봐~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 해주면 좋겠어.


생각에 잠긴 1호를 뒤로 하고 난 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 잤다.

시험이야 뭐~ 내 알 바도 아니고,

우리 팀 학생들이나 잘 봤으면 좋겠다~ 소망하며. ㅎㅎ


시험 이틀 전, 1호가 sos를 보내왔다. 

그리고 우린 열심히 준비했고,

결과는 아쉽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1호의 눈동자가 집에 온 거에 감사했다.


시험은 끝났고, 

1호는 답답함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답답함과 함께 생활하는 방법을 터득한 거 같다.

사춘기 사용법을 얻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감기를 얻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가 점점 목이 부은 느낌이 나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았다.

오전에 약을 먹고 그대로 잠이 들었고, 2시간이나 자고 일어났는데도 몽롱했다.

겨우 정신 차리고 수업하고 점심약을 먹어야 하는데 용기가 안 나 건너뛰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저녁 먹고 바로 약 먹고 잤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까지도 어지럽고 약에 취해 깨어나는 게 힘들었다.

- 아니 대체 얼마나 센 약을 준거야!!


일부러 약을 안 먹고 내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하루, 이틀 괜찮게 지나갔지만 내 목소리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무리 꿀물과 유자차, 따뜻한 물을 들이부어도 내 목소리는 1호의 변성기마냥 가라앉고 있었다.


다른 병원에 갈까 하다가 다시 그 병원을 찾아가 항의했다.

약이 너무 독하다, 내 생활이 안될 뻔했다, 이번엔 좀 약을 바꿔 달라. 등등

당당히 요구했다.


눈을 끔벅끔벅 두 번을 하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매번 먹던 같은 약인데요


너무 당황한 나는, 아니 그럼 내 증상은 뭐예요!!라고 따졌다.

- 그건 아픈 거예요. 아파서 그래요.


그렇다.

난 감기로 아팠다.

근데, 그걸 몰랐다.

아니, 인정하지 않았다.

내 몸인데, 보고도, 느끼고도 몰랐던 것이다. 


1호도 그러했을 것이다.

친구에게 물리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아 답답한 게 아니었고,

숙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못해가는 게 답답한 게 아니었고,

준비한다고 하는데도 등교 시간을 못 맞춰서 답답한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지금 무기력하는구나.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답답한 거였다.


  엊그제 1호가 사달라고 한 책이 도착했다.

2호가 도서관에서 빌린 건데 1호가 보고는 맘에 들었다고 사달라고 한 책이다. 


 

머리를 구름 속에 두고 사는 몽상가라.. 참으로 1호스런 책선택이다.

- 왜 이 책이 꼭 사고 싶어?

- 그냥 좋아서요

- 아니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뭐가 좋아?

- 그렇게 사주기 싫으세요?

- 사주지~사주고말고, 간만에 사달라는 책이 있어서 궁금해서 그래.

- 구름 보는 게 좋아요.


오늘, 1호에게 365가지의 구름 사진을 선물할 생각 하니 설렌다.

뭐 하늘 쳐다보면 맨날 있는 구름을 굳이 책으로 사서 봐야 하나 했다가.

책장 넘겨보고 나도 반하고 말았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구름,

매일매일 달라지는 하늘,

매일매일 달라지는 마음,

매일매일 다른 우리의 모습.


그런 모습들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이,

내 목소리도 돌아오고 있다.


7월의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명품런하듯 어딘가 달려가는 구름들인가...상상력 마이 죽었다, 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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