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양 Feb 07. 2023

노안입니다

잠자리에 누워 일본 드라마를 보고 책을 많은 읽은 탓인지, 핸드폰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아팠다. 눈이 아프니 머리도 아프고 쉽게 피곤했다. 안과에 가서 시력검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노안인 것 같은데, 가까이에 있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여요.”


내 말에 의사는 나이가 몇인데 벌써 노안이 왔겠냐, 라며 웃었다. 기계로 내 눈을 들여다보고 검사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안구가 건조하다고 했다. 안구건조증 안약과 인공 눈물 약을 처방하며 ‘뭐, 노안이 일찍 올 수도 있죠.’라고 노안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력이 적힌 종이를 건네며 안경점에 가서 돋보기를 맞추라고 했다. 남편 친구가 하는 안경점에 가서 돋보기를 맞추었다. 돋보기를 맞추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기분이 묘했다. 내 눈이 늙었구나.



처음에는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으니 글씨가 선명하고 크게 보여서 좋았다. 세상일이 그렇듯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하나씩 따라오기 마련이다. 코 위에 무언가가 걸쳐져 있으니 신경이 쓰였다. 썼다 벗었다 하는 것도 불편했다. 책을 읽다가도 집안일을 하러 일어날 때나, 화장실을 갈 때는 돋보기를 벗어야 했다. 결국 다초점렌즈를 맞추었다. 안경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핸드폰이 굴곡져 보이고 초점을 맞추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글씨를 읽어야 했다. 게다가 마스크를 쓰니 안경에 습기가 차서 밖에서는 주로 벗으니 적응이 더뎠다. 학창 시절에 안경 쓴 친구가 똑똑해 보이고 특별해 보여서 부러워했었다. 이렇게 불편한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이가 가끔 나에게 자기가 쓴 글씨를 나에게 보여주려고 내 얼굴 가까이에 들이밀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몸을 뒤로 빼며, ‘이렇게 가까이에 대면 잘 안 보여.’라고 말하면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이 잘 안 보인다니, 아이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만도 했다. 멀리 있는 것은 잘 안 보이고 가까이에 있는 것은 잘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다. 잘 움직이던 팔이 일정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게 되고,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 길바닥에라도 주저앉고 싶어질 때가 있다. 늙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종종 텔레비전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볼 때 건강하게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만약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보지 못하는 것,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 팔이나 다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힘들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읽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만약 보지 못한다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외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아침 해가 뜨는 것과 저녁노을이 지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자는 아이가 깰까 봐 어둠 속에서 김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김밥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보지 못하면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보지 못하면 먹는 낙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듣거나 말하지 못한다면? 물론 수화로 기본적인 의사는 전달할 수 있겠지만,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불을 끄고 누워서 아이와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이고, 아이가 들려주는 노랫소리와 ‘나는 엄마가 좋아.’라고 말하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며 수다도 떨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마음속의 이야기도 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삶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삶만큼이나 고립되고 외로운 삶일 것이다. 팔, 다리가 불편한 삶에 대해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우리 몸 어느 곳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우연히 ‘원샷한솔’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이 흐릿하게 보여 안과를 찾게 된 김한솔 씨는 두 달 후에 실명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신경염증을 진단받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정밀검사를 한 결과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밝고 긍정적인 한솔씨는 자신처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화장실 푯말의 점자가 거꾸로 되어 있거나, 지하철 푯말 밑에 있는 점자가 잘못 표기되어 있는 것을 영상으로 제작했다. 모든 캔 음료수 위에 점자로 ‘음료수’라고만 점자가 되어있는 것도 지적했다. 그의 영상을 보고 많은 사람이 요청해서 컵라면에 점자가 표기된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 역시 영상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 눈이 노안이 되고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어 더 관심이 갔을 것이다. 무심히 지나쳤던 엘리베이터의 점자를 유심히 보게 되었고, 도로의 점자블록이 군데군데 끊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가다가 점자블록이 끊어지면 우리에게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게 돼요.”



그의 말에 시험 삼아 점자블록을 밟으며, 눈을 감고 걸어보았다. 단 5초도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우리는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고나 질병으로 신체가 불편해지는 상황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차가운 마음으로 그들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집 밖을 나오지 말라는 따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내몰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나 갈 수 있도록 노란 점자블록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당연한 것이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쓰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