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와 가까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종종 가곤 했다. 어릴 적 외가에 가면 사촌 언니들의 방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당시 언니들은 대학생, 고등학생이었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 나는 마루에 배를 깔고 숙제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마당에서 놀다가 그것도 지겨워지면 언니들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들 방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방문을 열면 코끝으로 희미하게 향긋한 향기가 나는 것도 좋았다. 언니들이 쓰는 앉은뱅이책상에는 책이나 화장품, 액세서리들이 놓여있었다. 작고 예쁜 상자 안에는 목걸이나 보석 박힌 머리핀도 있었다. 언니들이 없는 동안 마음껏 물건들을 가지고 놀다 보면, 이런 것들이 내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이라 감히 달라고 졸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루는 언니들 방에서 목걸이를 하나 발견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눈이 부실 만큼 예뻤다. 목에 걸어보았다. 탐이 나서 몰래 가져가고 싶었다. 이렇게 많은 물건 중에서 이것 하나 없다고 언니가 눈치를 챌까? 나는 목걸이를 필통 안에 숨겼다.
사촌 언니들은 세 명이다. 큰언니는 대학생이어서 잘 만나지 못했고, 만나도 나에게 별로 말을 걸지 않았다. 둘째 언니는 덩치도 크고 욕심도 많았는데, 성격이 괄괄해서 외할머니도 쩔쩔맬 정도였다. 나도 그런 둘째 언니가 무서웠다. 목소리도 크고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혼을 냈다. 셋째 언니가 가장 예뻤고 성격도 좋아서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나는 목걸이의 주인이 둘째 언니만은 아니길 바랐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언니들도 하나둘 집에 왔다. 할머니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내 귀는 언니들의 방 쪽으로 열려있었다. 언니들 방문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당장이라도 언니 중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젖힐 것만 같았다. 그때, 둘째 언니가 나를 불렀다.
“김선양! 나와 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쿵 터질 것만 같았다. 내 바람과는 달리 목걸이의 주인은 둘째 언니였다. 언니는 아침까지 있던 것이 없어졌으니 내가 가지고 갔다고 짐작했다. 집에는 할머니와 나밖에 없었고, 할머니가 목걸이를 가져갈 리 만무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순간 얼어붙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언니가 큰 소리로 나무라자 부엌에 있던 할머니가 나왔다. 사태를 파악한 할머니는 나를 조용히 따로 불렀다.
“니가 언니 꺼 뭐 가져갔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열어 목걸이를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나는 어릴 적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아이가 생기면서 그림책을 공부하고 번역 일을 시작했다. 번역하면서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찾아내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안의 있던 ‘작가의 꿈’이 살아났다.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글쓰기 강좌를 등록했고, 이어서 글쓰기 모임도 시작했다. 글을 써서 제출해야 하는 마감이 있다 보니 일상이 글쓰기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날은 그럭저럭 써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떠다니며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었다. 간신히 문장 하나를 붙잡아 시작해 보지만, 곧 잡념들이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 진전이 없고 글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났다. 어떤 글을 쓰면 사람들이 공감해 주고 재미있게 읽어줄까, 밤새 고민한 적도 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이렇게 표현하면 되는데.’ 하며 새삼 재능이 없는 자신에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있었다. 유려한 표현이나 완성도 높은 문장을 만나면 부러운 마음에 질투가 나기도 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자들에 대한 질투가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그런 날은 유명 작가가 나타나 나를 괴롭히다가 뒷모습을 보이며 유유히 사라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들의 문장이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의 반짝이는 문장을 훔치고 싶었다.
몇 년 전 유명소설가의 표절 논란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작년에는 유명작곡가가 표절한 곡 때문에 방송매체에서 자취를 감춘 일도 있었다. 둘 다 한때는 글로 곡으로 내 마음을 달래주던 사람들이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이십 때의 고독하고 외롭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밤을 새워 그의 곡을 들으며 실연의 아픔이나 청춘의 막막함을 견딜 수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반짝이는 것을 갖고 싶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언니에게 금방 들켜버려 ‘훔친 물건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을 일찍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늦게 들켜버렸다. 그들의 글과 곡이 좋았던 만큼 배신감과 함께 따라오는 안타까움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표절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반짝이는 것을 훔치고 싶었던 마음만은 충분히 이해한다.
오늘도 책을 읽으며 훔치고 싶은 무수히 많은 문장을 만난다. 탐이 나지만 나는 나의 글을 쓴다. 쓰고 또 쓰다 보면 언젠가는 내 글도 반짝일 것이다. 그런 날이 조금 일찍 올 수도 있고, 시간이 좀 많이 걸릴 수도 있다. 어쩌면 끝내 반짝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진짜 내 것은 반짝이지 않아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