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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Apr 18. 2023

계속해보겠습니다

        두 번째 그림책이 나왔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알렸더니 ‘축하한다, 수고했다, 대단하다’ 등등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 같아 기뻤다. 그림책 공부를 한 지 5년, 번역을 한 지 4년째다.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찾고 나면, 국내에 소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즐겁다. 그러나 막상 기획서를 보내놓고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이렇듯 그림책 번역 일은 설렘과 막막함이 공존한다. 어쩌다가 출판사 쪽에서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도, 이미 판권이 계약된 예도 있다. 한 번은 몇 달 전에 주문해 놓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뒤늦게 기획서를 써서 보낸 그림책이 있었다. 편집자는 기획서를 보고 그림책이 마음에 들어서 알아봤더니 이미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을 전해온 적이 있었다. 한동안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그림책을 펼쳐보며 아쉬워한 적이 있었다. 한 권의 그림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게다가 운도 따라야 한다. 그래도 이 일은 막연하지만 무언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번역으론 돈 못 벌 것 같은데 ㅎㅎㅎ 계속 하실 거예요?」   

  

  몇 명이 함께 있는 단체톡 방에서 지인하나가 찬물을 끼얹었다. 한참 뒤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내 눈을 의심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ㅋㅋㅋ’과 함께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뒤이어 나왔다. ‘ㅎㅎㅎ ㅋㅋㅋ’ 문장을 끝내기 어색할 때 의미 없이 자주 쓰이는, 마침표를 대신하는 이상한 기호가 되어버린 자음자. 나는 황당했고, 당황했다. 무슨 뜻일까? 보아하니 돈이 될 것 같지 않으니 에너지 낭비 말고, 일찌감치 관두라는 충고인 건가? 아니면, 내가 들인 노력을 비웃는 것일까? 황당하고 당황했다가 메시지를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빴다. 며칠 동안 그 메시지는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양치하다가도, 설거지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메시지는 당장 전화를 걸어 따지라고 충동질해 댔다.  

    

  짧은 메시지를 곱씹어 보았다. ‘번역으론 돈 못 벌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외서를 주문하고, 그림을 분석하고, 텍스트를 번역하고, 기획서 작성까지 들인 시간을 다 합쳐도 최저임금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계속 하실 거예요?’ 이 말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머릿속에 박혀 콕콕 쑤셔댔다. 들인 시간에 비해 돈도 안 되고, 누가 하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번역 일을 하는 걸까? 글쎄, 왜일까?



 며칠 후, 자려고 누웠는데 아이가 ‘엄마~’하고 불렀다. 자기 싫어서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었다. 아이는 평소에도 말이 많지만 자기 전에는 더욱 말이 많아진다.

 “왜에?”

 “엄마~, 집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가지고 오래.”

 자려고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하던 끝에 갑자기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책을 고르러 거실에 나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라 하고 방에 불을 켜주었다. 아이는 조금 있다가 책을 하나 골라 등 뒤에 숨기고 들어왔다. 삐죽이 나온 책 모서리가 빨간색이다. 나에게 책을 보여준다. 두 번째 번역한 ‘고양이 스웨터’다.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책을 가방에 넣고 다시 자리로 와서 누웠다. 아이는 누워서 또 ‘잘 들어봐~’하고 운을 띄웠다. 아들의 계획은 이랬다. 자기가 학교에 가서 ‘고양이 스웨터’를 소개하면,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집에 가서 사달라고 조를 거라 했다. 그러면 책이 많이 팔릴 것이고, 내가 유명해질 거라고 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조잘댔다. 방이 어두워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들떠있고 희망에 차 있었다. 첫 번역 책을 냈을 때 ‘옮긴이’라는 말을 몰라 한참을 설명해 주었는데. 이제는 나를 유명 번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기특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역 그림책을 유치원에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읽히고 독서통장에 그림책 이름을 써주었었다. 작가의 이름을 적는 곳은 있는데 옮긴이의 이름을 적는 곳은 없다며 안타까워했었다. 작가란에 두 줄을 긋고 ‘옮긴이’라고 적고 ‘김선양’을 적어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얼마 전 초등학교 학부모 면담 때 담임선생님은 아이에게 들어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형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외국 그림책을 옮기고, 그림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나는 문제의 메시지를 ‘고이’ 캡처해 두고, 그 방의 지난 대화를 삭제했다. 대화를 삭제하며 더 이상 메시지의 내용을 곱씹어보지 않고 잊기로 했다. 당장은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심정으로 아들의 계획을 응원해 본다. 나를 자랑으로 여기는 아들은 내가 ‘돈이 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계속하는 이유였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유명해지고 싶다. 그리고 아들의 계획을 꼭 성공시키고 싶다. 하지만 나는 꽤 ‘뒤끝’ 있는 인간이므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고 간단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반복된 거절로 절망이 나를 후려칠 때, 더는 할 수 없겠다고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나는 고이 모셔두었던 메시지를 꺼내볼 것이다. 그때 그녀의 메시지는 또 다른 의미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계속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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