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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Jan 09. 2023

갈 때는 미니멀, 올 때는 맥시멀

선우가 보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KTX 표를 예매했다. 남편과 함께 주말에 가면 편하지만, 외가에서 며칠 더 지내고 싶어 하는 아들의 바람대로 둘이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니 짐을 최소한으로 가져가야 했다. 일단 목표를 가방 하나로 정했다. 아들에게 이번에는 KTX를 타고 가니까, 장난감이나 책을 마음껏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꼭 가지고 가고 싶은 것만 골라서 꺼내놓으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해서, 한동안 물건들을 죄다 내다 버리며 공간을 비우고 마음도 비웠다. 사용하지 않는 그릇과 컵, 입지 않는 옷, 자질구레한 장식품들이 일요일마다 집에서 재활용장으로 옮겨졌다. 이번 주는 주방을 뒤집어 컵이나 식기류를 버렸고, 그다음 주에는 베란다의 해묵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집 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청소하며 끊임없이 불필요한 물건들을 내다 버렸다. 몇 달을 그렇게 했더니 슬슬 남편 눈치가 보였다. 하루는 남편에게 더 버려도 되냐고 물었더니 ‘나만 버리지 않으면 돼.’라고 하며 나의 미니멀라이프에 따라주었다. 그렇게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니 싱크대 위에 있던 살림살이들은 키 큰 장으로, 식탁 위에 있던 물건들은 싱크대 안으로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오신 시어머니가 여기 있던 것들이 다 어디로 갔냐며 놀라셨다. 아이 장난감과 책도 많은데 물건들이 밖으로 나와 있으니, 가뜩이나 좁은 집이 더 좁아 보였었다. 물건을 버리고 공간을 비우니 집도 넓어 보이고, 청소와 정리도 수월해졌다. 물건마다 제 자리가 있으니 아이가 장난감이나 책을 꺼내서 거실이 어질러져도, 제자리를 찾아 넣으면 금세 공간은 깔끔해졌다. 그 후 나는 주기적으로 물건들을 비워냈고 필요 없는 물건은 되도록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수년간 단련된 미니멀리스트인 나에게도 이번 여행의 짐 싸기는 고난도였다. 아이의 여벌 옷과 속옷, 양말, 치약, 칫솔, 바디워시와 샴푸, 샴푸캡, 물티슈, 티슈, 마스크, 비상약과 충전기, 노트와 필기구, 책과 장난감, 가지고 갈 물건들을 꺼내 보았다. 역시 백팩 하나로는 무리였다. 백팩을 하나만 메야 두 손이 자유로워, 아이 손을 잡고도 나머지 한 손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짐을 줄여도 가방 두세 개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물건을 꺼내놓고 보니 평상시 자동차로 갈 때보다는 짐이 몇 배나 줄었다. 이렇게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갈 수도 있었는데, 그동안은 뭐가 불안해서 이것저것 불필요한 것들까지 모조리 싸 들고 다녔던 걸까. 한 번 더 반성했다. 짐을 줄이고 줄여도 결국 가방은 두 개가 필요했다.


  가방이 두 개여도 아들의 물건을 넣으니, 내 물건을 넣을 자리는 넉넉지 않았다. 실내복은 엄마나 동생 옷을 빌려 입기로 하고, 내 짐은 속옷과 책, 노트와 필기구로 가짓수를 줄였다. 영주에도 눈이 많이 쌓여있다고 하니, 남편이 오기 전 며칠 동안 밖에서 눈을 가지고 놀면 장난감이 많이 필요 없어도 되겠다 싶었다. 그러면 KTX를 타고 가는 시간 동안의 무료함을 달랠 정도의 장난감이나 책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먹을 간식과 음료를 샀다. 우리는 서둘러 화장실을 다녀온 뒤, 자리에 앉았다. 가족들에게 여행의 시작을 알리고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간식을 꺼내 먹었다. 사진도 찍고 책도 읽으며 기차여행을 즐겼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책을 꺼내 읽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아들은 과자도 빨리 먹어버렸고 가져간 두 권의 책도 금방 읽어버렸다. 그러고는 언제 도착하냐고 자꾸 물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온 물건들을 꺼냈다. 나는 실뜨기, 큐브 맞추기, 블록조립을 하며 아이와 놀아주었다.      

  영주에 도착하니,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게다가 친정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이라 새하얗고 깨끗한 눈이 그대로였다. 큰길로 나오는 길의 눈을 치우던 엄마와 그 곁에 있던 강아지 바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대충 짐을 집안에 던져놓고 눈밭을 뒹굴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 천사를 만들었다. 아들은 눈싸움을 하자며 나에게 눈을 던졌다.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이 흩어지며 얼굴과 목을 차갑게 적셨다. 놀라서 소리치며 도망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아들은 깔깔거리며 눈 뭉치를 들고 쫓아왔다. 도착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우리는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서, 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했다. 썰매가 아빠 차에 있어서 아쉬워하는 아들에게 비료 포대에 짚을 넣어 눈썰매를 만들어주었다. 그래, 겨울이면 이렇게 하루 종일 밖에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놀았었지. 눈이 오면 비료 포대에 짚을 넣어 그걸 눈썰매 삼아 탔다. 그것도 시시해지면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눈싸움을 했다. 누구네 집 논이 얼었다 하면 대충 만들어 볼품없는 얼음 썰매를 가지고 나가 탔다. 엄마나 아버지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산으로 들로 눈을 헤치며 술래잡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놀았었는데. 그때는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어도 재미있었는데. 새삼 그 시절 함께 놀던 언니들이나 친구들이 그리웠다. 30여 년 전 내가 그랬듯이, 아들은 변변한 장난감이 없이도 재미있게 놀았다. 어쩌다 보니 아들은 의도치 않은 미니멀라이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혹시 몰라 여벌 옷과 보드게임을 챙겨둔 가방을 가지고 남편이 금요일 밤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가방은 가지고 온 그대로 차에 실렸다. 내가 가지고 간 물건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에는 정말 최소한의 짐만 꾸려서 가야겠다고 한 번 더 생각했다. 하지만 5일간의 친정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날, 남편의 차는 온갖 물건들로 꽉 찼다. 엄마가 거실에 내놓은 보따리들이 끊임없이 차로 옮겨졌다. 쌀, 김치, 배추, 무, 고기, 옥돔, 과메기, 참기름, 냉동식품, 채소, 장아찌, 차에서 먹을 과일과 음료수. 갈 때와는 달리, 나는 맥시멀리스트가 되어있었다. 서울에 잘 도착했다고 엄마에게 전화하니, 청국장을 깜빡 잊었다며 다음에 택배로 보내주겠다 하신다.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우리 집에 왔는데, 미처 주지 못한 것이 있다니. 짐을 정리하며 생각해 보았다. 미니멀라이프를 살고 싶은 딸과 무엇이든 맥시멀로 주고 싶어 하는 엄마. 냉장고를 열어보고 엄마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챙겨줄걸……’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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