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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Jul 09. 2024

하던 거 하자, 내가 잘하는 일

도망치지 말기

사춘기 딸과 함께 하다 보니 나도 사춘기였나 보다. 20년 넘게 하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보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UX 디자인은 항상 새롭고 늘 재밌고 뿌듯하다. 그래픽에 강점을 둔 디자이너로서 UX 디자이너로 롤을 확장하기 위해 어린 딸을 두고 새벽까지 공부하며 UX 디자인 학위를 따내고야 말았던, 그때의 열정은 40대 워킹맘이 겪을 수 있는 여러 문제로 차갑게 식어버렸다.


반듯한 리더의 모습으로 팀원들을 소중히 챙기며 알차게 팀을 꾸려 나가도, 느닷없이 내려온 낙하산에 파묻혀 시야가 가려지는 경험, 건강하고 착하게만 자라거라~ 했던 따님의 등교 거부와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1년의 시간, 돈 못 버는 회사에 다닌다는 죄로 뼛속까지 느껴지는 가난함...


지쳤었다. 마침 회사 경영악화로 자유의 몸을 찾게 되었다. 변화의 신호일까?




놀지 말고 빨리 취업하세요!

너무나 아꼈던 팀원들은 푹 쉬기엔 아직 젊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아 성장해야 한다. 그동안 같이 일해오며 실력이 늘어가는 그들을 보며 늘 아쉬웠다. 여긴 우물이야. 이만큼이면 다른 곳에서도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 너무나 좋은 팀 분위기에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그들을 잡고 싶은 마음 반, 더 큰 세상으로 밀어내고 싶은 마음 절반이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시간, 그들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


가난한 회사는 우리에게 큰 위로금은 주지 못해도 월급을 받으며 구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때 나는 멈추지 말고 준비해서 빨리 다른 곳에 가라고 그들을 떠밀었다. 정작 나는 손 놓고 있으면서 말이다. 나는 음.. 20년 넘게 일했다는 마음속의 핑계와 함께.


두 달간의 외도

월급이 나오는 고급 백수로 지낸 두 달이었다. 그동안 디자이너의 정체성은 잠시 넣어두었다. 부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으니 유행 따라 부동산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루 4만보씩 걷는 임장도 해보았고, 극 I를 이겨내고 조모임도 꾸준히 나갔다. 낯설었지만 모르던 세상이 재밌기도 했다. 새로운 지역을 알아가는 것이 재밌고, 이 것이 내 길이 아닐까?라는 희망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 구멍이 점점 커져갔다. 더 이상 재밌지 않고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다시 내 일이 하고 싶어졌다. 팀원들과 신나게 토론하던 그 시간, 팀원들의 결과물을 리뷰하고 던진 의견을 끄덕끄덕하며 받아 적던 팀원들의 모습, 남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나만의 관점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어도 땅속에 처박히지 않게 해 주었던 것은 내 일에 대한 자부심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내 일이 하고 싶어졌다.


이제 준비 좀 해볼까?

팀원들에게 일단 취업 준비, 즉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놓고 쉬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었는데 정작 나는 두 달을 놀았더니 막막하다. 며칠을 새 페이지를 만들었다 지웠다 반복했다. 오늘에야 어느 정도 틀이 잡혀 마음이 좀 놓인다. 40대 중반, 다른 일을 도전해 볼 수 있는 충분한 나이다. 반면, 내 일을 더 할 수 있는 나이기도 하다. '나 다른 일 준비해 볼 거야' 하며 내가 노는 것에 대한 잔소리를 사전 차단했었다. 솔직히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두려움이 있었다. 분명 내 나이에 취업은 이 전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5년 전도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 하겠지. 수많은 거절이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두려움에 도망쳤던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대로 도망가기엔, 난 내 일이 좋다. 아직 다른 도전은 재미없고 오히려 내 일이 더 그리워진다.




딸의 사춘기가 끝나기엔 아직 멀었고, 늘 내 속은 시끄러울 것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지니 취업은 무슨 취업, 그냥 애나 챙기자 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생각을 바꿔보기로 한다. 어지러운 내 주변 상황에서도 나는 일어서야 한다. 이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버리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찾기 힘들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 어지러운 주변.. 모두 다 나의 삶이다. 그 삶을 즐겨보자.


그 안에서도 내 일을 잘했던 내 모습, 좀 멋지잖아. 용기 내서 다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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