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자존감
오늘 여섯 번째 실업급여를 받았고 이제 한 번 남았다. 지금 나는 알토란 같은 실업급여가 한 번 남아 아쉬운 게 아닌, 두 번만 불합격하면 된다는 안도감이 든다.
2002년 1월부터 2024년 6월까지(이직으로 비는 몇 개월과 첫 번째 실업급여 수급 기간 7개월을 빼고) 고용보험을 내는 근로자였고, 그동안 회사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퇴직하게 되어 두 번의 실업급여를 받게 되었다. 한참 현업에 있을 나이였던 첫 수급때와 다르게 수년간 관리직 경력만 있는 40대 중반의 나는 전과 비슷한 수준의 직장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최근 만들었던 서비스도 일반적으로 익숙하지 않아 설명이 많이 필요하다. 유명하지 않은 서비스라도 'How'의 관점으로 잘 풀어내면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리더를 오래 했으니까 실무자처럼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건방진 생각은 아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이제 자신이 없다. 빠르게 돌아가는 IT 시장에서 UX 철학을 지키며 디자인으로 풀어내기엔 장벽이 많았다. '우리의 사용자를 아는 것'과 '회사와 조직원은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의 중요성을 늘 주장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달랐다. 기준 없이 바뀌는 방향과 말도 안 되는 데드라인, 검증 없이 입사한 낙하산들로 인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20년 넘게 몸담은 IT 업계에 점점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떠났는데,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잘해요~라는 메시지를 어떻게 담을 수 있겠는가.
원래 하던 업에 마음도 떠나고 이력서에 쓰기엔 부담스러운 나이도 되다 보니 인생 2막을 준비하고픈 마음이 커졌다.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했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개업과 공인중개사 취업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지만, 나는 또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다. 좀 더 적성이 맞을 것 같은 행정사 준비를 해볼까 한다. 합격한다면, 행정사와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같이 차리는 게 나의 계획이다. (불합격 옵션은 나중에 고민하자)
실업급여란 '고용보험' 가입자가 실직을 하게 되면 재취업 활동을 하는 기간에 생활 안정 및 재취업을 위해 소정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조건이 있지만 간단히 얘기하면 비자발적으로 실직 상태가 되었을 시 구직활동을 하며 생활비 목적의 비용을 지원받는 것이다. 최근 실업급여 수급자가 많이 늘었고, 반복수급자와 부정수급자도 많아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분명 부득이하게 일을 못하게 되었을 경우 정말 유용하고 필요한 제도이다. 그러나 내가 느낀 문제는 다른데 있다. 현재의 실업급여는 '직장'을 찾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구직활동을 매달 해야 하고, 5주 차부터는 달에 두 번의 입사지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처럼 '직장'이 아닌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경우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입사지원이 부담이 된다. 물론, 직업교육이나 자영업 준비 등 다른 길도 있지만 과정이 복잡하고 온라인 강의를 통해 자격증 준비를 하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공인중개사 준비를 할 때에도 관련 학원의 온라인 수강생임에도 강의에 접속할 때마다 최근 접속 시간이 업데이트되기에 부정 출석의 우려가 있어 '구직활동'에 해당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전 업과 관련된 곳에 이력서를 내야만 했다. 혹시라도 잘 진행되어 몇 년간 월급쟁이를 더 하면 좋으니 계속 다닐만한 곳으로 고민하여 넣긴 했다.
만약 인터뷰 보라고 하면 어떡하지? 란 고민이 어이없게도 번번이 떨어졌다. 처음엔 잘되었다~ 싶었지만 불합격이 반복되니 서류합격조차 못하는 나에 대해 자존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없이 받아봤던 디자이너 지원자들의 포트폴리오만큼 준비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수라면 알만하게 구성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부족했고 부담스러운 나이 등 여러 가지 원인을 떠올리며 쥐구멍을 찾게 된다. IT 업계는 내가 떠나는 거였는데,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쫓겨나는 것이 검증되었다고 해야 할까.
마음이 아픈 딸의 치료와 밀착 케어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 내 손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아이를 옆에서 더 챙기고 싶다. 그리고 행정사도 꼭 합격하여 새로운 직업으로 45세 이후를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몇 달간 일을 할 수가 없다. 공부하고 아이를 챙겨야 하니까.
이제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두 번의 입사지원을 해야 한다. 운이 좋아 합격하면 행정사의 꿈은 뒤로 미루고 직장생활을 더 할 수도 있다. 신용점수 1000점 만점의 내가 무직자가 되며 1 금융권 대출이 힘들어졌다. 직장인의 이점을 더 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하지만, 줄줄이 낙방 경험을 보아 두 번의 불합격 소식이 예상이 된다. 귀하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는 뻔한 불합격 메일에선 내가 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같은 업으로 취업할 계획이 있다면 회신이라도 해서 물어보고 서류를 보완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저 마음 단단히 먹고 지원하련다. 무직자로서 한 달의 실업급여는 소중하니까.
그 외에 실업급여를 받으며 느꼈던 점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다양한 연령대가 대상이라 시스템을 확 바꾸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창구에 가면 큰 소리로 질문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시니까.
긴 기간 고용보험을 냈고, 그에 대한 혜택으로 자격이 되어 수급받는 상태지만 아쉬움이 남는다니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구직'활동에 직장뿐만이 아닌 직업을 구하는 경우의 배려가 부족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고 변명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