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건 신뢰
지하방 세입자가 방을 빼자 세를 놓기 전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리모델링 후 두 번째 입주라 도배, 장판 정도만 해도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전 세입자가 담배를 너무 피워 온 집안이 노랗게 물들고 곳곳에 곰팡이도 올라와 전반적인 보수를 해야만 했다.
잠시 여행 계획이 있어 혹시 세입자가 먼저 나가도 절대로 혼자 청소하지 마시라고 엄마께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건만, 세입자는 딱 여행기간 중 이사를 했고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엄마 성격상 곳곳의 묵은 때 청소를 하셨다. 여행 후 5년 만에 열어본 방은 엄마의 청소에도 불구하고 담배 찐내와 묘사하기 힘든 냄새와 얼룩으로 쪄들어 있었다. 엄마는 바로 도배와 장판을 하길 원하셨지만, 지저분한 것들은 도배로 덮더라도 반지하 특성상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곰팡이가 핀 부분은 제대로 보수를 해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했다.
도배 전,
우리 집엔 반지하 세대가 두 개 있다. 5년 전 같이 리모델링했고 그중의 하나는 현재 내가 사용 중이다. 몇 년간 사용해 보니 확실히 벽 습기는 환기로 예방이 되지만 바닥 습기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관 쪽과 외벽 쪽 장판이 거뭇거뭇해지는 걸 볼 때마다 어떻게 해야 저걸 잡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었다. 이사 나간 집이라도 장판을 열어 보수할 수 있으니 그렇게 고민을 해소해 보기로 한다.
일단 곰팡이가 핀 일부 벽지와 장판을 뜯었다. 동네 소규모 인테리어 업체가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망을 주었다. 분명 벽을 허무는 것 외 전체 리모델링이었는데 벽지 일부분만 뜯어도 허술하게 공사한 흔적이 드러났다. 30년 전 집 지을 때부터 차곡차곡 덧발라져 있던 벽지들, 기존 몰딩을 해체하며 생긴 벽 틈에 그대로 벽지를 바른 흔적(외풍이 솔솔), 결로가 많이 지는 곳이라 특별히 신경 써달라는 곳에 어떤 단열처리 없이 얇게 발라져 있던 벽지.. 등등 외에도 한숨이 푹푹 나온다.
며칠을 쪼그려 앉아 벽지와 장판을 뜯고 곰팡이를 제거하고 결로방지 페인트를 발라 내가 할 수 있는 보수를 했다. 엄마가 알아보신 동네 지물포 사장님은 전화를 안 받으신다 하셔서 당근에 올려 바로 연락이 온 분에게 도배와 장판 예약도 했다.
첫째 날,
예상보다 부른 금액이 컸지만, 적극적으로 답해 주심이 고마워 한 번에 결정했다. 경험상 시공일은 아침 일찍부터 오시기에 이른 아침부터 맞을 준비를 했으나 9시가 넘어 여자 한 분이 도착하셨다. 1.5 룸이지만 여자분 혼자 가능할까 우려가 되었지만 편견일 수도 있으니 반갑게 맞아드렸다. 그리고 그분은 한쪽 면에 단열지를 대려면 벽을 다 뜯어야 한다고 하셨다. 맡겨만 둘 수도 있겠으나 혼자 그 벽을 다 뜯으려면 시간도 힘도 많이 들겠다 싶어 나도 같이 도와 뜯었다. 셀프 집수리에 어느 정도 도가 텄다고 생각하지만, 벽지 뜯기는 다시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긴 했다.
단열지가 말라야 하니 진짜 도배는 다음 날 하기로 하고, 결로가 많이 생기는 세탁실 쪽은 페인트를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주셨다. 그렇게 다음 날 세탁실 벽지 뜯기 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둘째 날
다음 날 아침, 벽지 뜯기 후유증으로 온몸이 아프지만 페인트는 나중에 칠하더라도 벽지와 깔끔하게 연결하려면 벽은 뜯어놔야겠다 싶어 아침 일찍 내려가 벽지를 뜯었다. 페인트를 칠하면 종이가 일어나기에 모두 깔끔하게 긁어내야 한다.
전 날 시공으로 몸이 아프다며 도배사는 12시쯤 오시기로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도배사는 오지 않고, 아무리 공간이 작아도 오늘 안에 다 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2시 좀 넘어서 도배사가 도착했고 도배를 시작했다. 도배사는 방에서 도배를 하고, 난 세탁실에서 벽지를 뜯으며 오후를 보냈다. 마침 세탁실 벽도 다 뜯었겠다, 대통령 탄핵 표결 시간이 되어 방송을 보고 기쁜 소식과 영양제도 전하며 홀로 일하시는 분께 감사함도 표현했었다. 저녁이 되어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노크 후 현관문을 열자 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혼자 계신다 생각했는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시는데... 지인들이 술 마시러 나오란 전화였고, 아직 도배가 한참남아 거절할 줄 알았던 도배사는 '내가 오늘 차림이 별로지만 알았다, 이 집 구조가 너무 이상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라고 하신다.
내가 밖에 있음을 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저 못 들은 체 페인트 칠을 하는데 나오더니 하는 말,
"어, 여기 계셨어요? 집 구조가 이상해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오늘 다 못하겠어요. 내일 저녁에 와서 해드릴게요."
이미 7시가 넘어가고 어차피 빈집이라 알았다고 했지만, 자신이 늦게 온 것은 생각지 않고 집 탓만 하고 있으니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셋째 날
전 날 도배사가 시키는 대로 창문을 모두 닫아두었더니 도배 습기로 창문 쪽 벽지가 일부 젖었고 노랗게 물이 들어버렸다. 다행인 건지 도배사가 올테니 보수해 달라고 하기로 하고 짧은 외출을 했다. 외출 후 돌아와 보니 심란한 엄마와 도배사가 대화 중인데, 이 집이 이래서, 저래서라며 이유를 설명하기 바빴다. 집의 구조나 상태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도배사가 맞다 틀리다는 말은 못 하겠다. 다만, 연식 대비 잘 지어진 집이고 깔끔하게 관리했다는 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노랗게 된 일부분만 벽지를 덧대주면 될 테인데 나이 든 엄마에게 하소연만 하는 도배사에게 일을 깔끔히 마무리지어주실 것을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투덜댔지만,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점과 분명 일을 맡기 전 집에 와 견적을 내달라고 한 말을 무시하고 사진으로만 봐도 된다고 했던 점 등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인지 묵묵히 일을 마치시고 돌아가셨다.
진짜 마지막 날, 넷째 날
도배사 통해 예약한 장판 시공일이다. 오후에 엄마와 나 모두 병원 일정이 있어 오전에 부탁드렸고 가능하다고 답변받았었다. 그러나 오전 내내 장판 시공의 연락은 감감무소식이다. 계속하여 도배사와 통화를 했으나 언제쯤 갈 거다, 차가 막힌다, 식사를 해야 한다...라고만 한다.
장판 시공은 1시가 다 되어 시작할 수 있었고, 시공하시는 분께 여쭤보니 오전에 해야 한다는 연락을 못 받으셨다며 '알았으면 이 집을 첫 번째로 왔겠죠'라고 하신다.
마지막까지 실망스러운 도배사의 일처리였다. 일을 잘하는 것에는 깔끔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고객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이사라도 예정되어 있었으면 큰 낭패일 뻔 했다. 정말 몸이 아팠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였다면 어차피 집이 비워져 있으니 도배는 나중에 해도 된다. 그러나 12시에라도 오기 힘들면 미리 연락을 했어야 한다. 큰 도움은 안 되었겠지만 도와드리고 청소까지 해드렸음에도 집 구조 핑계만 대시던 그분, 기본적으로 시간에 대한 개념을 더 잡으셔야 할 것이다.
우여곡절 있었지만, 깔끔해진 집은 금방 새 주인을 찾았다. 5년간 담배로 찌든 에어컨도 세척했고 블라인드도 새것으로 다시 달았다. 이번엔 비흡연자인 근처 대학생이다. 어쩜 이렇게 공부 잘하는 아들을 두셨냐는 칭찬에 어깨가 으쓱하던 아버님과 귀엽게 생긴 학생이 와서 집을 둘러보았다. 바로 학교 앞은 아니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깔끔한 집을 찾던 중 발견한 우리 집, 그 학생이 원하는 미래를 이곳에서 꿈꾸고 잘 만들어가면 좋겠다.
그나저나 도배사는 우리에게 실망과 함께 또 다른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지독한 감기'. 기침을 많이 하던 도배사와 오랜 시간 한 공간에 있어서인지 나에게도 감기가 찾아왔다. 평소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편인데 이 번 것은 달랐다. 일주일간 된통 앓자 이어 엄마가 앓더니 아이마저 독감에 걸려 버렸다. 온 식구가 콜록대고 아파하니 내가 죄인이 된 느낌이다. 나도 억울하니 최초 감기를 준 도배사를 조금 원망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