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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까스 Jul 13. 2022

덕혜옹주 - 권비영

2022.07.04 - 2022.07.06

어릴 적, 커다란 차들이 씽씽 달리는 찻길 옆에 세워진 고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옹이는 썩어문드러져 가고, 만물이 움트는 화창한 봄날에도 이파리 하나 피워낼 기운을 갖지 못한, 저무는 해 같은 고목이었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그 나무를 발로 밟으며 놀았습니다. 줄기가 구불구불한게, 어린 것들이 타고 오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하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친구들과 그 나무를 오르는데, 높은 가지 끝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한 송이의 작은 꽃을 발견했지요. 생명이 스러져가는 고목에서 이다지도 영롱한 자태의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이 자못 경탄스러웠습니다. 그 꽃은 마치 한평생 예술에 몸바쳐온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탄생시킨 역작과 같이, 고목이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명의 기운을 그러모아 피워낸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뿌리가 마르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할지라도 고목은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 꽃을 발견한 이후로 나는 때마다 가서 꽃이 잘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부는 날에는 꽃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이리저리 흩날렸습니다. 나는 혼자서 노심초사하며 그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저 꽃이 버티고 또 버티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항상 애처롭게 꽃이 매달려있던 가지가 마치 실어온 폭탄을 마침내 떨어트린 전투기처럼, 원래부터 자기는 홀몸이었다는 듯이 자못 당당한 태도로 깔끔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햇빛에 고드름이 녹아 없어지듯 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꽃을 찾아 고목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그러나 꽃은 무자비한 바퀴들에 짓밟혔는지, 무수한 발길질에 찢겨나갔는지도 모르게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나는 무척이나 상심하여, 그 날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계란말이마저 마다하고 방에 처박혀 우울을 앓았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꽃을 찾아보았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이 일로 상심한건 나뿐이 아닌 듯 하였습니다. 꽃을 찾으러 고목을 방문할 때마다, 고목도 허리숙여 꽃을 찾는듯 점점 가지가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른들이 얼굴을 찌푸린 채 그 고목을 손가락질하며 떠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며칠 후, 커다란 레미콘 트럭이 왔고, 그 고목은 뿌리채 뽑혀나갔습니다. 오랜 세월 고목과 살을 맞대며 살아온 흙 역시 한 웅큼조차 남지 않고 생생하고 영양이 가득한 새로운 흙으로 교체되었습니다. 고목은 마지막 뿌리 한 줄기가 뽑혀나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의 한 가닥 냄새라도 맡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러한 고목의 노력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목이 뽑혀나간 자리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싱싱한 새 가로수가 심겨졌습니다. 어른들은 비로소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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