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0
트레바리 독서 모임의 마지막 책이다. 4달 전, 첫 번째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은 인상적인 의견이 있었다.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독자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작품 어디에서도 위로의 메시지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분께서 "문학의 역할은 보여주는 것 까지이고, 해석은 독자에게 달렸다. 위로의 메시지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의견을 주셨다.
나는 그동안 비교적 명확한 메시지가 담긴 글들을 주로 읽었다. 학생 때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 대학생 때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입론, 고시생 때는 법전,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은 발명자들의 기술에 대한 설명서를 자주 접한다. 모두 작가가 특정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쓰는 글들이다. 하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포함하여 트레바리에서 읽은 네 권의 책들은 전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양귀자의 <모순>은 그나마 갈등구조가 명확하여 논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침이 고인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나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특정한 메시지를 쉽게 캐치하기 어려웠다. 물론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다는게 아니라, 그 메시지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는 소리다.
우리는 문학을 왜 읽을까? 얼마 전 친한 친구와 술먹고 편하게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될거야"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가는 친구였기에 그 말은 앞으로의 다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해 내리는 정의처럼 들렸다. "책, 영화, 예술을 접하는 이유가 그거인 것 같아. 매체를 통해서 멋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상을 발견하게 되는 거지." 이 말을 듣고, 흐릿하게 내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이 일시에 정리되는 것 같았다. 문학은 우리에게 상(像)을 제시하고, 우리는 그 중 일부를 취사선택하게 된다. 작가가 특정 입장에 입각하여 글을 쓰지 않았더라도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생활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책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단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에는 여자친구의 자살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남자가 등장한다. 자살해버린 연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소설까지 쓴 그 사람은 사랑에 푹 빠져버린 남자를 대표하는 상이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약 그 남자였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왕오천축국전에 등장하는 낭가파르바트까지 가서 목숨을 걸고 등정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이 주는 고통이 크다고 하더라도 '나'를 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상'에 맞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문학이 제시한 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니 읽는 재미가 배가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책을 읽을 때는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는 법도 있다는 것을 트레바리 네 번의 모임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그 방법이란,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본 후, 나의 스펙트럼으로 비추어 평가를 내리고 나만의 상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