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2
나는 분명히 '김연수' 작가의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원더보이> 등의 책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그 옆에 <설계자들> 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나의 머리속 저편 어디엔가 묻혀 있던 이름이었다. '김연수 작가가 정말 활발하게 활동하신 분이구나!' 나는 <설계자들>을 뽑아들고 안쪽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돌아와서 보니, <설계자들>의 작가는 '김언수' 작가였던 것이다.
이렇게 우연하게 본 책이지만, 이틀만에 완독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다. 이 책은 자객들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설계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 '래생'을 비롯한 자객들은 '설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만든 계획에 따라 청부 살인을 한다. 설계자들은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살해 대상을 선정하며, 살해 방법 및 시체를 처리하는 법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선정한다. 그 계획은 너구리 영감이 운영하는 '개들의 도서관'(이른바 '도서관') 또는 한자 라는 인물에게 전달되고, 또 너구리 영감과 한자가 데리고 있는 자객들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된다. 즉, 인체로 비유하면 설계자들이 뇌와 같은 컨트롤타워라면 자객들은 손 또는 발이 되어 뇌가 내린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계획의 실행에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사소한 실수가 계획의 중대한 수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래생이 스무살 때, 한 여자에 대한 살인을 의뢰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와 단 둘이 밀폐된 방에서 대면하여 죽이는데 성공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든 연민으로 인하여 설계자들이 의뢰한 '목을 부러뜨려' 죽이는 것이 아닌, '약물을 투입하여' 죽이게 된다. 결과가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설계자들의 입장에서 이는 설계에 중대한 오류가 발생한 것과 같았다. 결국 래생은 설계자들의 복수를 피해 이 살인 세계를 잠시 떠나있게 되며, '훈련소 아저씨'라는 무고의 피해자를 낳고 나서야 다시 살인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래생은 이때부터 이러한 범죄 집단의 구조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래생은 책의 중반부부터 '미토'라는 여자 설계자와 공모하여 한자를 처리하기로 결심한다. 미토의 목적은 한자 따위의 피래미가 아닌, 다른 설계자들까지 모조리 없애버려 이 기형적인 범죄 구조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데 있었다. 래생은 이 마지막 설계에 가담하여 미토의 손과 발로써 행동하게 된다.
'설계'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도 여러가지 의미로 쓰인다. 가장 단순한 의미로는 '계획을 세움' 을 의미할 뿐이나, 그 계획의 범위가 무궁무진하다. 술자리에서 여자를 꼬시기 위한 계획일 수도, 게임에서 보스 몬스터를 잡기 위한 계획일 수도,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기 위한 계획일 수도, 포커에서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계획일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세상에는 무수한 '설계자'들이 존재한다. 책에서는 살인을 위한 계획만을 말하고 있으나 현실 세계에서는 더 많은 '설계자들'과 '너구리 영감'과 '한자'와 '래생' 들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삶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다른 역할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계획을 짜는 '설계자'인 아버지가, 직장에서는 거래처로부터 일감을 수주하여 직원들에게 분배하는 '너구리 영감'인 동시에 거대 자본가들이 펼쳐놓은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 아래에서 부품처럼 돌아가는 '래생'일 수도 있다. 나도 삶의 여러 영역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나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설계자이며, 엄마에게서 부탁을 받아 동생에게 전화를 해야하는 너구리 영감이며, 회사와 사회와 국가가 정한 양식의 행동을 수행해야 하는 래생이다.
생각해보니, 너구리 영감의 포지션이 참 흥미롭다. 설계자는 '뇌', 래생은 '손과 발'이라면 너구리 영감은 무엇인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설계자들의 살해 대상과 살해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래생같은 자객들을 부려야 하니 그들의 애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외로운 사람. 너구리 영감이 골방에 박혀서 백과사전만 읽고 있는 것은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자신 혼자 정지해 있는 듯한 세상에서 단단해 보이는 지식의 뿌리라도 붙잡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자유 의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래생은 자객으로, 이미 짜여져 있는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야 하는 기계 부품일 뿐이다. 그가 아니어도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수많은 자객들이 있을 것이다. 너구리 영감 역시 중간 관리자 역할이지만 그 역시 살인의 대상을 정할 수도, 들어오는 의뢰를 거절하거나 더 받기 위하여 영업을 할 수도 없다. 설계자들만이 자유롭게 살인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다리의 아래 층을 밟고 있는 사람들은 그 결정 과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 너구리 영감과 래생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여자를 죽이는 데 목을 부러뜨려 죽이나 약물을 주입해서 죽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살인 행위에 있어, 이들의 자유 의지는 없다. 살인을 행하고 나서 드는 양심의 가책을 달랠 방법을 찾는 과정이 그들의 자유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고 하겠다.
래생은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 친다. 그가 죽인 이발사 역시 칼싸움을 하면서 래생에게 악감정을 드러내보인 적은 없고, 죽음의 순간에는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 마치 이 기나긴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줘서 고맙다는 듯이. 그들은 모두 예리한 칼날일 뿐이다. 그 칼을 들고 있는 손이 그들이 찌를 방향을 결정할 뿐,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금속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칼을 들고 있는 손을 찌를 수밖에 없다.
나의 상황 역시 비슷하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설계'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나 자신의 행동 뿐이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래생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 상황에 대한 나의 판단은 어떠한가. 이 상황을 타계하고 싶은가? 아니면 이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는 후자 쪽이다. 출퇴근이 빡빡하지 않은 회사에서 지내면서 연애도 잘 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원래 불만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유 의지'. 내가 받은 설계 도면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가는 나는 언제라도 설계자들에 의해 '설계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설계자라면 훨씬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더 확대하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왔다. 시험 준비를 할 때에도 내가 스스로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되뇌었던 말은 '자유를 위해' 였다. 자객의 삶은 자유 의지를 점점 더 잃어버리는 길이 될 뿐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삶이 그를 증명한다. 어떻게 해야 설계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책에서는 설계자가 어떻게 설계자가 되었는지 과정을 서술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눈 떠보니 설계자는 설계를 치고 있었고, 자객들은 사람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어떻게 설계자가 되냐가 더 중요한 화두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