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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까스 Sep 27. 2022

모비 딕 - 허먼 멜빌(2022.09.26)

파멸적인 안식을 선택한 남자의 이야기

이 책을 처음 접한(발견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심심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교실 뒤편 책장에 <백경>이라는 두꺼운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딱 봐도 오래된 디자인에, 한역된 제목 <백경>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며(당시 내가 아는 한자 '경'은 거울 경(鏡)뿐이었다) 먼지도 쌓여 있어 가볍게 무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여러 경로로 <모비 딕>을 접하게 되고(우영우, 스타벅스 등등...), 나는 <모비 딕>을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완독까지 한달이 넘게 걸릴줄은 상상도 못했다. 700쪽에 달하는 페이지를 보고도 그저 '그 유명한 모비 딕'을 읽는다는 생각에 가슴만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수건 한 장만 깔면 베개로 써도 될 법한 두께


<모비 딕>을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은 두 명이다. 하나는 이야기의 서술자인 '이슈메일'이며, 다른 하나는 이슈메일을 비롯한 다른 선원들이 타고 있는 포경선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해브'이다. 에이해브는 이전에 전설적인 흰 향유고래 '모비 딕'과 한 차례 싸워본 적이 있고, 그 때 한 쪽 다리를 잃게 되었다. 그로 인한 복수심으로 에이해브가 피쿼드 호를 몰고 전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모비 딕을 찾아다니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줄거리이다. 그는 결국 모비 딕을 찾아내어 싸움을 벌이나, 최후에는 영문학 3대 비극 중 하나답게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직접 포경선을 타본 경험을 바탕으로, 모비 딕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독자가 마치 실제로 함께하듯 실감나게 그려준다.


소설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결말의 복선을 잔뜩 늘어놓으면서도 그 결말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간다는 점에 있다. 에이해브는 여정의 초기에 스페인 금화를 이용하여 선원들의 마음에도 모비 딕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을 심어주는데 성공한 듯 했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들부터 하나둘씩 파멸의 냄새를 감지하고, 여정이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에이해브 그 자신마저 예정된 비극을 감지하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결말을 알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열연을 펼치는 비극 배우들 같다. 선원들이 죽거나 미치고, 질병에 걸렸다가 겨우 되살아나는 모습들은 그들 모두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복선이었다. 이러한 복선은 마지막에 모비 딕과의 결투 장면에서 가장 도드라지는데, 총 3번의 싸움 동안 보트들이 차례로 완파당하는 그 모습은 마지막 전투에서 본선 피쿼드 호와 에이해브 자신에게도 동일한 결말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신의 낫이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아니 에이해브는 파멸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걸까? 모비 딕을 만나기 직전에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그들의 선장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마지막 설득에 힘쓴다. 하지만 에이해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만적인 주인, 잔인하고 무자비한 황제"가 자신을 떠밀고 강요하고 밀어붙인다고 하며, 끝까지 모비 딕을 사냥할 것을 고집한다.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어떤 존재였을까?


숙명(宿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숙명은 처음에는 인간에게서 태어났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덩치를 키워 그를 잉태한 인간을 되려 채찍질한다. 인간의 내부에서 강철같은 감정의 회오리벽에 의한 보호를 받으며 커버린 숙명은 나중에는 그 발 밑에 인간을 무릎꿇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에이해브가 흰 고래에 대해 품은 증오심을 자신의 숙명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에이해브 자신이 그 숙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해브의 불구대천의 원수, 흰 고래 모비 딕


책에서 굉장히 인상깊었던 구절은 바로 고래의 소유권에 대한 법령이었다. 고래는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생명체로, 사냥에 성공했다고 한들 육지까지 데려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따금씩 사냥한 고래들이 물 속으로 가라앉거나 다른 배로 떠밀려가는 경우가 생겼는데, 그로 인한 소유권 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포경 법령이 생겨났다고 한다. 1695년 네덜란드 의회에서 공포된 이 간결한 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둘째, 놓친 고래는 먼저 잡는 자가 임자다.

조문 자체는 매우 심플하지만, "법조문이 너무 간결하면, 그것을 설명하는 한 권의 방대한 주해서가 필요하게 된다." 주요한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잡힌 고래는 무엇인가?
둘째, 놓친 고래는 무엇인가?

작가는 처음에는 '소유권'의 개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가령, 노예들의 근육과 영혼은 '잡힌 고래',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동전 한 닢은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잡힌 고래', 파산자가 대부업자에게 돈을 빌릴 때 대부업자가 뜯어내는 비싼 이자는 '잡힌 고래'와 같다. 아메리카는 에스파냐에게 '놓친 고래', 폴란드는 러시아 황제에게 '놓친 고래', 그리스는 터키에게 '놓친 고래'와 같다. 이후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대한 비유는 소유권의 개념을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 모든 인간의 마음과 의견, 종교적 믿음의 원칙, 커다란 지구 자체 모두를 '놓친 고래'에 비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들 역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로 비유한다.


세상에는 '놓친 고래'와 '잡힌 고래' 두 가지 종류의 고래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바로 '자유 고래', 즉 소유와 종속의 개념에서 자유로운 고래이다. 소유권의 개념에서만 따져보면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놓친 고래'와 '자유 고래'는 동일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으니, 바로 '잡힐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의 존재 여부이다. '놓친 고래'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한 번 잡혔다가 풀려난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자유 고래'는 태초의 자유를 그대로 간직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풀려났다고 해도 '잡힌 고래'였던 경험이 그 고래를 영원히 '놓친 고래'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단 한번의 사로잡힘이 고래에게 내재된 자유를 영원히 앗아가지는 않는다. '잡힌 고래'가 아닌 고래가 '놓친 고래'로 남을지, 아니면 '자유 고래'로 도약할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고래 그 자신이다. 자유를 한 번 잃은 경험에 주눅들어 모든 순간에 두려움에 떨며 지낸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놓친 고래'일 것이지만, 잡혀본 경험을 자신의 지혜로 승화시키고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는 고래는 잃어버린 자유를 진정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놓친 고래'는 '잡힌 고래'와 같다.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안전과 안락, 난로와 저녁식사, 따뜻한 담요, 친구들, 우리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 강풍 속에서 항구나 육지는 그 배에 가장 절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서 도망쳐야 한다. 배가 육지에 닿으면, 용골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 전체가 몸서리칠 것이다. 배는 돛을 모두 펴고 전력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배를 고향으로 데려가려는 바로 그 바람과 맞서 싸우고, 또다시 거친 파도가 배를 때리는 망망대해로 나가려고 애쓴다. 피난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험 속에 뛰어든다. 배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배의 가장 고약한 원수인 것이다! - 152p 발췌


지금 나의 삶이 자유 고래의 삶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는 '놓친 고래'이기보다는 '자유 고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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