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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May 16. 2019

스티브 맥퀸, <노예 12년>

솔로몬 노섭의 뉴욕에서 아카이 걸리의 뉴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3일 동안 찍었던 사진을 모두 날렸다. 정신이 아득했다. 사진 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기던 중 SD 카드를 잘못 건드린 탓이다. 어떻게든 넋을 붙잡으니 이제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필라델피아에서의 기억이 사라져 여행의 어떠한 증거도 남지 않게 된다면 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겠구나, 여행은 왜 하는가, 시간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종국에 모두 사라질 텐데 무슨 소용인가.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존 버저의 <사진의 이해>에서 당장 위로가 될만한 구절이 있었나 힘겹게 되뇌었다. 없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시간을 위해 꼭 질문의 답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내게, 어쩌면 우리에게 사진은 그런 것이다.



잠들기 전 조금 걷자며 호텔을 나섰다. 어쩐 일인지 도로가 비어있었다. 오른편 멀리 경찰을 양편에 대동하고 천천히 걸어오는 시위대, hands up, don’t shoot을 연호하는 그들에 섞여 콜럼버스 서클에 이르렀다. 브로드웨이를 따라 행진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센트럴파크에 들어섰다. 브루클린에서 흑인 남성 아카이 걸리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하루가 지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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