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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May 21. 2019

데이비드 슬레이드,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이말년처럼 와장창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이하 밴더스내치)>는 영화라고 소개되었을 뿐 게임의 형식을 가졌다. 게임에 참여하는 이는 본인의 결정이 주체적이며 능동적이라고 믿을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 능동적인 이는 코딩을 한 사람, 연출을 한 사람, 규칙을 만든 사람뿐이다. 이기고 싶은 충동을 극복하는 것이 능동의 일환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체스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말의 배치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했던 마르셀 뒤샹마저 규칙의 구애를 받는 수동적인 플레이어였다. 게임을 시작한다는 선택 자체는 능동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게임을 시작한 후 유일하게 허락된 능동적 행위는 모든 규칙을 거부하거나 판을 뒤엎는 것뿐이다. “게이머에게 선택권을 너무 많이 주려고 했어요 원점으로 돌아가 가지를 다 쳐냈죠 이젠 자유도가 높다는 착각만 줄 뿐이지 엔딩은 제가 결정해요”라는 스테판의 대사는 이 사실을 증언한다. 다시 말해, 주체가 되는 유일한 길은 영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 즉 영화를 끄거나, 주인공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밴더스내치>는 영화를 고르는 행위와 보는 행위가 사실은 지극히 능동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메타 영화인 듯 보인다. 관객이 주인공의 행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주인공이 누군가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교묘한 눈속임이다. 주인공이 관객의 존재를 알아챘다고 느껴지게 만든 것은 관객이 아니라 감독이다. 비로소 감독은 스테판뿐만 아니라 관객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관객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데서 시작하는 여느 조종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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