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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Jan 26. 2019

넷플릭스, 칸 영화제, 그리고 영화

영화를 영화 되게 하는 것


1.
올해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인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는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경쟁 부문 진출 영화 중 영화관에서의 상영이 제한되는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발언 중 스크린의 크기가 감상에 주는 영향을 논거로 삼았다. 관객이 큰 스크린이 보여주는 이미지 앞에서 겸손하고 작아지는 것이 영화의 충분조건이라는 그의 주장은 분명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한 관점이다. 스크린의 크기는 영화 감상에 있어 명백히 중요한 요소이며, 스크린의 크기로만 전달될 수 있는 감동과 그와 관련된 담론은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논거와 별개로 다음의 더욱 본질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영화 감상과 영화관에서의 그것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과연 스크린의 크기에 있는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일련의 행위의 핵심 중 하나는 영화 감상이 그저 상영관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영화관에 도달하여, 표를 구매하거나 예매표를 출력하고, 팝콘과 음료를 구매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배우나 감독,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고, 나오며 감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 감상’의 시퀀스에서 영화의 시청은 가장 중요한 단계일지라도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신체가 공간을 이동하며 단계별 행위의 주체가 되는지의 여부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영화 감상과 영화관에서의 영화 감상의 가장 중요한 차이이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영화 감상은 영화관에서의 영화 감상 시퀀스를 영화 시청이라는 하나의, 혹은 그것을 포함한 간소한 몇 단계로 축소한다. 자리에 눕거나 앉아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선정하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과정이야말로 기존의 영화관에서의 경험을 대체한 행위이며 스크린의 크기는 이 상위 변동에 따른 부차적인 변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의 확언에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그의 정의가 내재하며, 그 정의는 많은 영화인이 공감해왔던, 여전히 공감하는 것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가 《시네마 천국》에서 그렸던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20세기의 정의 그 자체이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사랑했던 영화는 그가 돌렸던 투사기의 필름으로서의 그것이 아닌 영화관의 스크린에, 그리고 건물의 흰 벽에 투사된 상으로서의 그것이었다. 알모도바르에게, 또 토르나토레에게 영화는 콘텐츠 자체가 아닌 그것이 가져오는 경험이었으며, 알모도바르에게 그 경험의 핵심은 스크린의 크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알모도바르의 발언이 본질적인 변화의 핵심을 관통할 수 있었으려면 스크린 크기를 포함한 영화 감상 시퀀스 전체의 붕괴, 혹은 변화에 대한 언급이 불가결했다.
수도원이나 채플의 계획에서 공간에 도달하는 과정의 경험이 공간 내에서의 경험 못지않은 중요도를 가짐은 어떤 시대의 건축가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모든 종교, 전통 행위의 의식 절차는 참가자의 자세의 변화를 야기하며, 가장 주가 되는 행위에 직접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이를 생각할 때 스크린 앞에서 작아지는 신체라는 알모도바르가 언급한 경험에서 스크린의 크기만큼 중요한 요소가 영화 감상의 다른 ‘의식 절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2.
반면, 적어도 본인의 가정에서는 영화 감상에 있어 넷플릭스와 영화관의 경계가 미세하다는 윌 스미스Will Smith의 발언은 회견의 자리에서는 어떤 호응도 받지 못했을지라도 TV나 휴대용 기기를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과반수의 대중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리라. 그가 언급한 경계의 미세함은 매체까지 도달하기 위한 장벽의 높이 차이의 미세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경험 자체에 대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매체 간 진입 장벽의 미세해진 차이가 대중들이 다른 요소의 구애 없이 온전히 그들의 기호에 따라 매체를 선택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하면, 넷플릭스는 영화 감상 경험 자체의 변화와는 별개로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며, 영화관은 기존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오히려 하나의 콘텐츠에 대하여 여러 종류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측면은 영화라는 예술 형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기반이 될 공산도 작지 않다.
영화는 복제를 전제로 한 최초의 예술 형태라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은 비디오테이프와 DVD를 거쳐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의 영화 산업 개입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1 기술의 발전은 자연히 매체의 변화를 야기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이론과 재정의는 불가피하며 이는 어느 시대, 그리고 어느 매체에서나 있었던 일이다. 물론 더욱 큰 화면과 좋은 음질로, 신중히 선정한 종이와 레이아웃으로 작업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모든 작가의 것이다. 음원 스트리밍 시장이 확장되자 MP3 파일 매매 시장은 자연히 축소되었지만, 이후 초고음질 음원 서비스 시장과 LP 시장은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전자책이 모습을 드러낸 지 오래되었지만, 종이책 시장은 건재하다. 넷플릭스가 등장한 영화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난과 비판은 매체를 초월한, 격동기의 불가분 요소이다. 담론의 성숙 끝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낡은 것이 되고 호불호, 대중의 선택만 남는다. 선호하는, 혹은 선호하지 않는 감상 방법은 존재할지라도, 옳거나 그른, 우등하거나 열등한 감상 방법은 오늘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은 오롯이 대중의 것이다. 이 시점의 영화계는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이 20세기가 막 시작된 시점에 선포한 어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평이나 용인하는 태도가 아닌 변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자세이다.”2



1 Walter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Lexington, KY: Prism Key Press, 2010.
2  Georg Simmel, 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 Chicago: Syllabus Divis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2017년 6월 4일에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hear_w_peace/221021251850)에 업로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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