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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Mar 28. 2022

추위와 바람의 굴레

이만희의 《휴일》과 벨라 타르의 《이 세상 끝까지》

// 서울시-문체부 공공미술 프로젝트 ≪리플렉트 프로젝트≫의 문집 ≪문득 떠오르는, 그 영화의 퍼즐: 플래시백_서울 모퉁이(1960-1969)≫(김은희 엮음, shhh 발행)에 실린 글입니다. https://reflect-project.org/publication/



다녀와야 할 데가 있어.”

가야 할 곳이죠?”

(허욱(신성일 분)과 여인(안은숙 분)의 대화 중, 이만희, 《휴일》)


이만희 감독을 모더니스트나 리얼리스트의 범주가 아닌 특정 무드의 감독으로 보는 김소영 교수의 시각1을 상기할 때 비로소 “텅 빈 풍광과 바람이 빚은 모더니즘”이라는 정성일의 평2에서 앞의 두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감상에 집중할 수 있다. 이 평은 남산 중턱에서 지연(전지연 분)이 낙태 수술비를 빌리러 간 허욱을 기다리던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연이 허욱을 기다리는 장면 내내 텅 빈 남산 중턱에 흙바람이 몰아친다. 정성일의 평은 이 남산 중턱의 물리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곳을 홀로 지키는 지연의 심정을 요약한다. ‘텅 빈 풍광’이란 사방이 트여있어 주변을 볼 수 있으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를 뜻한다. 그 공간을 채운 것은 ‘바람’이다. 텅 비어있지만 동시에 바람에 요동치는 상태, 지연의 가장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태는 이렇게 완전히 비어 있지도, 그저 요동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비어 있었고, 동시에 요동쳤다.


어떤 공간이 특정 감정을 상징한다는 교과서적 평론이나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처칠(Winston Churchill)의 주장3에 기대는 대신 바람이 부는 텅 빈 곳이 실제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자문해봄 직하다. 온전히 텅 빈 풍광과 그곳을 채우는 바람의 물리적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일상이 아닌 ‘휴일’, 특히 여행할 때였다. 코펜하겐 남부의 한없이 펼쳐진 들판(Bumlebjerg)에 홀로 앉아 노을을 바라보던 여름 저녁은 따뜻했고 바람도 불지 않아 평온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 세 나라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한 수도원(Abdij Sint-Benedictusberg)에서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구름 낀 봄 오전 유럽 내륙의 산란광이 은은히 채웠던 수도원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이상한 감상을 자아냈다. 결코 공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브라티슬라바에서 출발해 부다페스트로 향하던 야간 버스에서 내려 여권을 검사받던 국경 검문소의 유난히 춥고 바람이 세찼던 겨울밤은 외롭고 공허했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만 간신히 보이는 칠흙 같은 밤, 십수 명의 인파에 섞여 여권을 검사받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돌이켜보건대 사람들과 함께한다고 해서 덜 공허하거나 덜 슬픈 것은 아니었다. 또 그저 춥기만 했다면 사색할 일말의 여유라도 있었을 텐데 거센 바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괴로웠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감각적인 신호(cue)는 돌이켜보건대 텅 빈 풍광이라기보다 한기와 바람이었다.


그런데 감독의 입장에서는 다른 문제가 있다. 설사 한기와 바람을 통해 절망이나 공허한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영화에서 표현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이유에서 감독이 어떤 시청각 요소를 경유해 이를 표현해내는지 주목해볼 만하다. 자신의 코트를 벗어 흙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돈을 빌리러 자리를 뜨는 허욱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연을 부감으로 찍은 장면을 떠올려보자. 화면 상단에 자리한 지연과 이미 화면 밖으로 나간 허욱 사이를 채운 것은 흙바람이다. 여기서 흙은 길이 포장되어있지 않던 60년대 서울의 시대상과 맞닿아있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형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방 안에 날리는 먼지가 빛의 경로를 드러내듯 감독이 흙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람의 존재였다.


추위는 감독이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며 보이고자 했던 또 다른 요소였다. 카메라는 떠난 허욱의 코트를 차마 걸치지 못하고 품에 안은 채 벤치에 걸터앉은 지연을 롱쇼트로 잡는다. 그리고 지연에게 줌인하던 카메라는 굳이 그를 지나 바람에 흔들리는 잎이 없는 배경의 나무에 다다른다. 쇼트는 여기서 끝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줌인하던 카메라는 공허한 표정이나 코트 없이 쌀쌀한 서울을 누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근심을 상징할, 코트를 움켜쥔 손에서 멈추지 않았을까. 감독은 오히려 잎이 떨어진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그녀의 상황과 심정을 더 잘 대변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흙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나무 또한 바람에 형태를 부여한다. 동시에 잎이 떨어진 나무는 계절을 상정한다. 다시 말해 앙상한 나무, 혹은 낙엽은 극 중의 기온을 알려주는 시각적 신호다.


여름이 풍요를, 겨울이 척박함을 의미한다는 일반론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상술한 대로 낮은 기온과 몰아치는 바람은 외로움과 절망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파르르 떨리는 몸이나 우수 가득한 눈을 통하지 않고도 미장센만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 실체에 우리가 모르는 사이 부여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를 주지할 때 감독이 해결해야 했던 과제는 잎이 떨어진 나무와 흙이라는 시각적 단서를 통해 관객이 추위와 바람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앙상한 나무가 한기와 바람을 현현하는 대상임을 다시금 떠올린다면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이 절망스러운 현실이었음이 명확해진다. 이렇게 감독은 두 주인공의 극 중 현실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남산 중턱 시퀀스에서 바람과 앙상한 나무가 인물의 심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된 사실이 유난히 강렬히 다가온 것은 몇 해 전 방문했던 한 전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의 아이 필름 박물관(Eye Filmmuseum)에서 열렸던 벨라 타르 감독의 전시 《이 세상 끝까지(Till the End of the World)》가 그것이다.4 당시는 연일 난민 문제가 일간지 1면에 오르며 매주 몇 명이 지중해를 넘다가 죽었는지 보도되던 때였다. 최근 1년간 모든 지적 담론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난민을 주제로 한 전시와 글이 쏟아졌었다. 평소 작가와 제목 정도만 훑고 전시를 방문하거니와 벨라 타르라는 이름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충분했기에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전시가 난민을 주제로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영화가 난민 문제로 축소될 수 없는 포괄적인 인간과 사회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기에 극 중 인물을 난민의 개념과 연동하여 해석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존재론적이며 운명론적인 인간의 나약함과 절망이 벨라 타르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주제인 만큼 이 주제에 더 잘 어울리는 다른 감독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은 전시의 주제도, 전반적인 만듦새도, 《토리노의 말(A torinói ló)》을 끝으로 은퇴했던 그가 이 전시를 위해 단편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시 초입의 공간 시퀀스였다.


전시장에 들어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공간은 네댓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너비의 복도였다. 어두운 복도의 양쪽 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윙윙대며 공간을 메우던 소리는 철조망을 따라 전진할수록 더 커졌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더 쌀쌀해졌다. 복도는 끝에서 왼편의 대공간으로 곧장 연결되었다. 그 공간은 마찬가지로 어두웠지만 비교적 넓었던 복도가 답답한 공간으로 느껴질 만큼 넓고 높았다. 울리는 소리의 발원지는 대형 선풍기였다. 공간에 들어서자 선풍기 바람은 정면으로 불어닥쳤다. 한편에는 2층 건물 높이 정도 되는 앙상한 나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낙엽을 날렸다.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에서 발췌한 영상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그다음 공간에서 이어졌다.


전시의 주제에 관해, 또 이 공간에 관해 어떤 배경지식도 없이 들어섰을 때 왜 철조망이 있는지, 그리고 대공간의 나무와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구태여 추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기, 바람, 어둠, 잎이 떨어진 나무가 불러일으킨 감정은 외로움, 슬픔, 절망이었다. 이 감정을 경유해 시퀀스를 복기하며 자연스레 난민의 키워드를 떠올릴 수 있었을 정도로 공간은 직관적으로 설계되었었다. 여기서는 관람객이 나무로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희망으로 오인하고 무책임하게 안도하며 전시를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라 타르 영화의 강한 명암이 극 중 인물의 절망적인 상황을 더 뚜렷이 보여주듯, 빛에 의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나무의 앙상한 윤곽은 난민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했다. 한밤중 이탈리아의 한 삭막한 해변에 탈진한 상태로 도달한 이들이 느꼈을 여러 켜의 감정을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잘 설계된 여느 공간이 그렇듯 전시 초입의 복도와 대공간은 주제를 미리 요약해 보여주는 데에서 나아가 전시 전체를 이해하는 맥락을 제공한다. 다음 공간에서 상영되던 《파멸(Kárhozat)》의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을 그저 즐거운 장면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영화의 내용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경험한 공간 시퀀스의 맥락에서 그 장면을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치(installation)는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서 나아가 경험하지 않은 일이 수반하는 감정을 물화하여 보여주는 전시의 책무를 다했다.


이렇게 《휴일》과 《이 세상 끝까지》가 문화, 시대, 장소 중 어느 것도 공유하지 않음에도 공통된 미장센을 통해 비슷한 감정을 환기한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배경 비교를 통한 정치·사회적 논의로의 확장 가능성을 암시한다. 사실 두 작품은 추위와 바람이라는 같은 요소를 차용했다는 점 외에도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휴일》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에 의하면 원래 시나리오에는 완성된 영화에서 보이지 않은 다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었다고 한다. 익사체로 발견된 허욱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기존 시나리오의 프롤로그였다면, 에필로그는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허욱의 부패한 시체가 신원미상 처리되는 것이었다. 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곧바로 기사로 접하던 난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익사의 키워드를 차치하더라도 원 시나리오에서 허욱에게 부여된 익명성은 난민의 정체성과 연동된다.


그러나 난민과 60년대 한국 룸펜 부르주아지를 일대일 대응시키거나 정치·사회적 지형에 관해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는 성립하지 않는 비교다. 두 감독 모두에게 극 중 인물이 특정 상황에 불가항력적으로 놓이게 된 사회적 맥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이들의 심경을 드러내는 일, 그 모습을 시각화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미장센이 불러일으키는 공통된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그러나 추위와 바람의 미장센은 외로움과 절망의 감정을 드러내며 현재 상황을 부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연은 굳이 남산 중턱에서 허욱을 기다릴 이유로 다방이 눈치 보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 중턱에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거기서 웅크리고 있었던 진짜 이유다. 바람이 몰아치는 곳이 상징하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거기에는 타자의 손길이 닿아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시에서 나무에 떨어지던 빛이 희망을 상징하는 대신 앙상한 나뭇가지를 오히려 부각했듯이 말이다. 지연은 《토리노의 말》의 마부와 그의 딸처럼 그저 흐르는 시간을 응시할 뿐이었다. 흙바람이 몰아치는 들판,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도피처인 낡은 집은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들은 달아나려는 욕구마저 상실했다. 그들의 오늘은 허욱의 일요일처럼 내일도 반복될 것이다. 이만희가 추위와 바람을 시각화함으로써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이렇게 추위와 바람이 상징하는 바는 비극적인 현실의 비가역성, 즉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국경을 넘고자 하는 난민과 마찬가지로 지연과 허욱이 넘고자 했던 것은 일요일과 평일의 경계였다. 하지만 지연은 죽음에서, 허욱은 일요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한때 그들이 가졌을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잊었다. 사랑하는 이나 하룻밤 상대를 만나는 일은 혹자에게는 휴일의 일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하지만 설령 비참한 현실의 경계를 넘는 데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유럽에 살아 도착한 이는 여전히 삶의 전제가 되어버린 고난 속에서 ‘디판(Dheepan)’처럼 끝없이 맞서 싸우거나 승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평일은 없다.


이렇게 이만희와 벨라 타르(그리고 자크 오디아르(Jacques Audiard))가 이야기하는 실패는 운명론적이다. 《휴일》에서 운명론적 실패를 암시하는 사례를 여럿 찾을 수 있다. 산부인과 의사는 허욱과 지연의 낙태 결정과 무관하게 그들이 처음부터 아기를 낳을 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영화 후반부의 플래시백 장면은 《기생충》의 마지막 시퀀스인 기우(최우식 분)의 망상 장면과 연동되며 운명론적 실패를 더 부각한다. 이 장면이 초현실적인 이유는 그들이 상상하는 현실에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이 이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만희 감독은 살아생전 이 영화를 공개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 문명 본연의 나약함이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주제인 그는 끝내 유혹과 죄악에 굴복하고야 마는,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인간상을 인류의 전형으로 상정한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실패는 이미 정해진 결론이다.


하지만 비극은 따로 있다. 그것은 실패가 영화나 전시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영화 안에서든 현실에서든 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덜 비극적이다. 벨라 타르가 구약 성경을 예로 들며 “모든 이야기는 이미 들려진 적이 있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진짜 불행은 이 이야기가 이미 전해진 적이 있다는 것,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로부터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5 비극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이라기보다 휴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며, 도피처인 유럽도 《디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고난의 장소라는 사실이다. 열차 종점에서 끝나는 ‘휴일’이지만 감독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암시해왔다. 허문영이 이만희를 ‘폐쇄공포증의 시인’이라고 칭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6 《토리노의 말》은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하는 영화였다. 동시에 이는 벨라 타르의 마지막 장편 영화였고, 다시 말해 필모그래피의 끝을 의미했다. 그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영화를 만드는 일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고, 세상에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일이 멈추어지려면 ‘이 세상의 끝’이 와야 했다. 원래 시나리오처럼 허욱과 지연 모두가 죽음을 맞아야 비로소 이 이야기가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녀와야 할 데가 있어.” 허욱의 말은 일련의 사건이 반복될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와 관계를 가지던 여인은 “가야 할 곳이죠.”라며 영화에서 처음으로 절망의 고리에서 벗어나 선형의 시간 흐름을 제시한다. 그러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듯 허욱이 산부인과에 도착해 마주하는 것은 지연의 죽음이다. 여인의 대사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죽음임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들어가던 그날 밤이 유독 외롭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도 “과연 추위와 바람을 맞는 이 찰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과연 그 추위와 바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 허문영, 『세속적 영화세속적 비평』, 서울: 강, 2010, p. 208.


2 정성일, “37년만에 창고서 건진 걸작…텅 빈 풍광과 바람이 빚은 모더니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movie/919529.html#csidx93cde2f7ee8019abccb60f15a18add8.


3 연설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shape our buildings and afterwards our buildings shape us.” Winston Churchill, House of Commons Rebuilding, HC Deb, 28 October 1943, Vol. 393, p. 403.


Béla Tarr, 2017, Till the end of the world, Eye Filmmuseum, 21 January-7 May 2017.


5 영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I have never been interested in stories, because the story is forever the same. Just read the Old Testament; it’s all in there. We don’t need to tell any new stories, since we always end up telling the same old story.” https://www.eyefilm.nl/en/programme/bela-tarr/125976.


6 위의 책,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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