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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세 May 07. 2021

팬데믹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1)

<죄와 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것

1866년 발표된 <죄와 벌>은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인생 역경은 작품의 창작 배경이자 주된 동기다.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으로 인한 징역형을 마친 이후인 1846년, 그는 아내 마리아와 형 미하일의 죽음을 마주한다. 남은 것은 1만 5000 루블 가량의 빚과 책임져야 할 가족들뿐이었기에, 그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 펜을 든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소설 <죄와 벌>에는 그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빠질 수 없이 등장하는 요소들이 있다. 그의 지병 간질과 도박, 그리고 가난이다. 모든 것들이 마치 망령처럼 죽을 때까지 그를 뒤쫓는다. 이로 인한 경험은 누구에게도 결코 좋은 기억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시베리아 유형 중 더욱 심화되었던 병 탓인지 소설 속에서 그에 대한 공포가 ‘범죄’와 연결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간질은 반복적인 발작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뇌 장애다. 인간은 자신을 의지대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큰 두려움에 빠진다. 더군다나 글을 써내야 하는 작가에게 뇌의 손상이란, 다른 의미로 ‘생존’과 직결되는 치명적인 병이었을 것이다. 하필 범죄와 ‘병’의 상관관계를 두는 그 의식의 흐름 밑바탕에는 이러한 삶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한다.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하고 즐거웠다고 평가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가장 우울한 시기에 쓰인 <죄와 벌>은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 속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마침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부활’로 귀결되는 결말은 독자에게 놀랍게도 현대적인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며 우리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하는 만큼 지금까지 들어왔던 수업에서 매우 다양한 러시아 문학가와 작품들을 접했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작가를 꼽자면 도스토옙스키라 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를 공부할 많은 기회가 있었고 여러 소설들을 읽어왔지만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통상 인물들의 여러 가지 목소리가 동등한 힘을 갖고 공존하는 ‘다성악 소설’이라는 용어로 그의 작품을 정의한다. 그러나 내 시도를 돌이켜보면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한 작가의 ‘언어’가 전하는 바가 무엇일지 찾아내고자 했던, 수어 갈래의 충돌 속에서 공존하는 그 메시지들을 하나로 압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누군가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을 굉장히 어려운 도전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분석은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수많은 ‘다성악적 메시지’ 중 한 갈래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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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 내용으로 진입하기 이전에 자체 창작물을 하나 두고 가겠다. 두 주인공의 관계를 피에타(Pieta)에 대입해 보았다. 아래 글을 읽기 전에도 기존 작품을 읽을 때 소냐의 역할에 주의했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이 글은 원작 소설을 읽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니, 내용 설명적인 면에서 굉장히 불친절하지만 주요 장면 스포일러는 전부 당해버렸다고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다시 한번, 미리 예고한다.


질병과 치료: 오만과 단절, 그리고 사랑        


놀라운 무료 이미지 - Pixabay
‘이성’이 흐려지고 의지가 마비되는 상태’에 빠지는 인간은 늘 실수를 저지른다.                                                   

범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탄로 나는 주요한 원인은 범죄자 자신의 심리적 갈등 때문이다. 죄를 저지르는 순간 의지와 이성이 상실되며 경솔한 짓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러한 상태를 ‘병마’ 탓이라 확신한다. ‘이(蝨)’같은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우던 그는 극도의 ‘이성적’ 상태를 추구하면서도 그만큼 커지는 불안을 막지 못한다. 범죄 수행 직전까지 점점 커지는 그것의 무게에 짓눌려 간다.


그는 극한으로 내몰린 ‘이성과 의지 상실’의 상태가 범죄 순간까지, 사람에 따라서는 범죄 후까지도 잠시 계속되나 이내 씻은 듯 지나가 버린다고 ‘착각’한다. 그는 결코 그 상태를 이겨낼 수 없었다. ‘선을 넘은’ 행위에 대한 후회, 일말의 죄책감, 불안함, 이를 자각하는 자신이 그저 ‘범인’에 불과함을 깨달은 절망, 자기혐오 등,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이후 느끼는 모든 감정은 스스로 ‘이성과 의지의 상실’에, 그 혹독한 ‘병’에 시달리게 하는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자백 직전까지,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 후에도 시달리던 물리적 ‘열병’은 불안정한 의식 상태의 표출인지도 모르겠다.


‘범죄란 언제나 그러한 질병을 수반한다’는 전제하에 전개되는 그의 이론에 의하면, 세상엔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 ‘초인’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런 ‘질병’에, 범인이 압도되는 ‘이성과 의지의 마비 상태’로부터 자유롭다. 인류를 위한 위대한 건설자나 은인들은 스스로 타인을 ‘처벌’함이, 그것이 당연히 옳은 행위임에 의심이 없다. 그들의 냉철한 ‘이성’은 그것이 더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편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초인론의 허점을 짚어낸다. 라주미힌과의 논쟁을 통해 라스콜리니코프 이론의 핵심과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말이다. 인류사 발전 중심에 있는 ‘인간’, 그들 중에서도 가장 특출 난 ‘초인’의 기여를 그 원동력이라 보았던 라스콜리니코프와 반대로, 포르피리는 범죄에 있어 커다란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흐름에서 사회 발전 자체가 ‘수학적 계산’으로 산출된 ‘일부의 사회 조직’에 의한 것, 즉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 이뤄낸 결과라는 사상이 포르피리 주장의 바탕에 있다. 그 힘으로 전 인류 사회가 발전하며, 궁극적으로는 올바르고 죄 없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매우 극단적인 유물론*에 대항하여 라주미힌과 같은 반대자는 ‘역사’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저 추악하고 우열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역사는 ‘혼’이 있는 인간이 모여 이룬 ‘살아 있는 과정’이라는 반박을 제시한다. 하지만 포르피리가 제시하는 ‘환경’이라는 변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간과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늘 완벽한 이성과 의지를 유지할 수는 없다.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종교적 관점을 배제하고서라도,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의 결정적 순간마저 ‘우연’에 맡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마주하리라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운명은 주위를 둘러싼 외부적 환경이 거역할 수 없는 순리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지배하는 무언가의 힘을 부정할 수 없는 한, 초인 역시 그러한 본질을 가진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의 이성과 의지가 늘 명료하리라, 그 판단이 항상 옳으리라 누구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인류사적으로 위대한 발전과 새로운 도약을 초래했을지라도, 그들이 ‘완벽한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증명하기에도 부족하다. 최소한 그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행위자를 둘러싼 외부적 환경 혹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말하는 특징을 가진 ‘초인’은 적어도 ‘병’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종종 그런 상태에 빠지는 ‘범인’들보다도 자신에게 이상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전당포 노파를 죽인 범인이라 의심하며 이렇게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그리고 마침내 초인 사상에 심취한 그에게 “병에 주의하십시오”라는, 매우 직접적인 경고를 날린다. 그 목적은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 버린 라스콜리니코프를 자극하여 원하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가 이미 ‘이성과 의지’를 상실해 어느 것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따라서 결국 그는 그토록 되기를 원했던 초인이 아닌 범인에 불과함을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범죄자들은 온전한 판단을 내릴 만한 이성과 의지를 잃은 ‘병자’라 할 수 있다. 이는 범죄자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병’이라는, ‘이성과 의지 상실’이라는 말이 넓게는 ‘범죄자의 심신 미약’적 상태로만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지만 ‘병에 걸린 사람’이 반드시 범죄자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따라서 그 의미를 더욱 정확히 하자면 ‘타인을 자신과 같은 의지와 이성을 가진 동등한 존재로서 존중하지 않는, 따라서 마치 가축처럼 도축해도 되는 존재라 멋대로 규정하는 오만함’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사회와 이를 이루는 다수 구성원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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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병’에 걸린 인간의 결말은 그것의 악화로 말미암은 ‘죽음’이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치료받지 않을 때 기다리는 종말이다.


이러한 형태의 ‘벌’은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범죄’와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그저 타인을 비롯한 자신마저도 혐오하고 마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옥에 가두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가족과 친구 간의 사랑이나 우정, 그로 인한 기쁨도 느끼지 못한 채 홀로 고립되어 갈 뿐이다. 그렇게 점차 ‘인격적 존재로서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이들에게 선고된 정신적인 벌이다.




라스콜리니코프와 매우 비슷한 유형의 인간인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작중에서 대표적인 ‘병자’라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증상은 이미 중증으로 라스콜리니코프보다 더욱 심각해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가 바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상 ‘초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모두가 공인하는 ‘악인’이다. 어린아이를 희롱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내를 독살했다는 혐의가 있으나 그럼에도 두냐에게 관심을 표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등 그의 행실은 결코 ‘범인’의 것이라 하긴 힘들다.


그가 베푸는 선행은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가 아니다. 그저 악인도 선행을 베풀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며, 일부 금전적 지원과 같은 행위의 주된 목적은 두냐를 얻기 위함이라는 불순한 동기로 인한 것이다. 그에게 모든 인간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와 반대로 그가 보여준 선행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선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며, 모든 인간은 그러한 선과 악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당연히 그도 인간이니 불완전한 존재에게 양립하는 특성 탓에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그의 악한 행동들은 그 역시 ‘병자’였음을 명확히 할 뿐이며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한마디로 회복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지속적으로 어딘가로 떠나고자 하는 의지를 직,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에겐 누구나 ‘숨 쉴 공기가 필요하다’고 외치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포르피리를 대면할 때 ‘나갈 곳도 없는 비좁은 데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음을 이야기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모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압박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이런 발언은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접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둘의 운명은 ‘숨 쉴 공간’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극단으로 내몰려 자살한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그럼에도 살아가려 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선택으로 반전된다.


결말이 보여주는 그들의 도착지는 각각 시베리아와 죽음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낸 결과는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굴복시킬 만큼 잔혹했다. 그는 자신조차 ‘두냐를 얻기 위함’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삼았으나, 결국 그녀에게 거부당한 후 비참하고 공허한 현실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이성과 의지’를 상실했기에 도피해 버린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틀린 이론에 의하면 그는 ‘초인’이 되나, 결국 현실 속에서 그는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다.


한편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시베리아’라는 공간은 도착지이자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곳이다.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의 ‘선’을 넘지 않은 인간에게는 회복될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가 죄를 고백한(병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 이후로도 곁에는 소냐, 두냐, 라주미힌이 남아 있다. ‘치료’를 위해 지속적으로 그를 보듬어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죽음 대신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회복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특히 라스콜리니코프처럼 타인을 거부하며 스스로마저 혐오하는, 단절된 인간에게 다가가 치료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는 그러한 질병은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치유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 증명된다. ‘병’에 걸려 증오와 혐오에 내몰리기도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살아갈 수도 없는 대다수의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존재다. 사회 공동체 속에서,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이 증명된다. 누군가의 자식, 남편, 아내, 그리고 친구 등 공동체 속 ‘나’의 모습은 ‘너’로 인해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를 사랑하고 소중히 대하며, 존경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하다. 이 특성은 ‘이성과 의지’를 비롯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요소다.




*유물론: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제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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