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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세 May 07. 2021

팬데믹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2)

<죄와 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용기와 사랑의 실현


모두 상관없습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따위, 별것 아닙니다.
뭐, 이건 새삼스러운 비밀도 아니니까 난 아무래도 좋습니다!
난 그래서 저런 것들을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양반, 당신은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좀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당신에게는 그런 일을 할 용기가 있습니까?
지금 나를 바라보면서 ‘너는 돼지가 아니다, 인간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말입니다!

-<죄와벌> 12페이지, 도서출판 마당, 이철 역-



성모 마리아 마돈나 - Pixabay의 무료 벡터 그래픽

마르멜라도프가 외친다. 몸을 파는 소냐가 번 돈으로 생활하는 그는 무능력한 가장이자 남편이다. 사회적으로 가장 비참한 곳에 위치한 딸을 향한 연민과 그녀에 기대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혐오, 가정에 대한 죄책감을 술로 해소하던 중 라스콜리니코프를 만난 그가 잔뜩 취한 채 말하는 장면이다. 경멸을 담은 타인의 시선에 맞설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기한 듯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부류의 인간을 보고 너는 쓰레기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굉장한 포용력을 지닌, 비범한  ‘용기’ 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신이 인정한다. 그리고 내심은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용감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에게 ‘너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해 주기를 마음속 깊이 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멜라도프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실현은 누군가의 용기로써 가능하다. 오로지 진정으로 용감한 자만이 상대의 밑바닥을 보고도 ‘그럼에도 너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며, 포용하는 누군가의 용기는 병든 인간을 향했을 때 그들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를 갖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초인’은 가질 수 없는 용기, 이 점을 지적하는 마르멜라도프를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천적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의 힘일 것이다.


초인과 범인을 구분해 비범한 존재가 아니라면 모조리 ‘이’로 취급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마르멜라도프가 말하는 종류의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최선은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마주하려는 정도에 그쳤으며 자신을 살피는 일에만 급급하니, 그로부터 더욱 큰 사랑과 위안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르멜라도프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타인의 인정과 이해를 바란다. 소냐는 그 일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마르멜라도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어떠한 원망도 비난도 없이 헌신적으로 그를 비롯한 가정을 보살폈다. 이런 그녀의 사랑은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느낄 만큼 따스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병든 자를 치유하고, 용서와 참회로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보듬었던 신의 모습과 닮았다. 동시에 용감한 ‘인간’으로서,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비롯한 모든 ‘병자’를 포용하며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실현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가 저지른 죄로 인한 괴로움으로 고통받을 때 소냐를 찾았다. 그녀를 통해 위안을 얻었으며, 그녀의 사랑을 통해 ‘부활’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것을 목격한 두냐는 ‘오빠는 인간이 필요해졌을 때, 그 여자에게서 인간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도스토옙스키가 표현하는 가장 참된 ‘인간’의 모습은 소냐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사랑’의 원동력인 ‘용기’를 갖춘,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초인이자 영웅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리고 있는 ‘인간’은 그러한 이상의 실현이 가능한 존재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이, 사랑으로 구원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팬데믹



지옥 처벌 라인 아트 - Pixabay의 무료 벡터 그래픽


죄를 고백한 이후 소냐와 함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온 라스콜리니코프는 사순절이 끝날 무렵과 부활제의 1주일 동안 신열에 시달리며 그동안 꿨던 꿈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슬프고 가슴 아픈 여운에 잠겼다. 그가 본 환각 속에서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병’은 이제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아시아, 유럽,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있었다. 그 역병의 증세는 인간의 오만, 증오, 폭력 파괴된 질서, 등 온갖 종류의 죄악들로 나타나며 휩쓸고 지나간 모든 곳을 아비규환으로 만든다.



온 세상이 아시아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유럽을 향해 번져 가는 어느 무서운, 그리고 일찍이 들어 보지도 못한 질병의 희생이 되어야 할 운명에 놓여있었다.
아주 적은 수의 몇몇 선택된 자만을 빼고는 누구나 멸망해야 했다.
일종의 새로운 이 미생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섬모충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 생물은 지력과 의지를 부여받은 정령이었다.
여기에 홀린 사람들은 삽시간에 정신이 착란 되어 발광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감염된 사람일수록, 인간이 지금처럼 자신을 총명하며 불변의 진리를 파악했다고 생각한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일찍이 이토록이나 자신의 판단, 자신의 학문에 있어서의 결론, 자신의 도덕적인 신념이나 신앙을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마을 전체가, 거리 전체가, 국민 전체가 거기에 감염되어 발광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불안에 쫓겨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나 자기 혼자만이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였고 남을 보고는 괴로워하고, 자기 가슴을 치거나 울거나 손을 마주 비비거나 하고 있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랐으며, 무엇을 악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악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선으로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되어있지 않았다.
누구를 죄 있는 자로 규정짓고 누구를 죄 없는 사람으로 할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혀 뜻도 없는 증오에 쫓겨 서로를 죽였다.
서로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이 되어 모였으나,
이 군대는 행군 도중에 별안간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여 대열은 엉망이 되고,
병사들은 서로 덤벼들어 찌르고 베고 물어뜯으며 난장판을 벌였다.

-<죄와벌> 430페이지, 도서출판 마당, 이철 역-


이는 작가가 바라본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어두운 단면이며, 그러한 창을 통해 바라본 서구 유럽 사회의 모습이자, 새 시대를 연 근대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그 화려한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그것에 의한 계층 간의 갈등, 인간 소외현상이 있다. 구시대의 어떤 도덕률, 가치, 신앙도 허물어져 버렸으며 신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인간들은 새롭게 발견한 지식으로 오만에 차 있다. ‘나’의 자각이 이루어진 순간, 선악과를 맛본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의 새로운 죄악이 시작된 것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은 이제 걷잡을 수 없다. 소수의 선택된 자들 만이 모든 것을 누리며 타인을 무자비하게 이용한다. 반면 다수의 개인은 그런 사회의 부품으로서, 돈벌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사회의 최하층에서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결국 ‘병’에 걸린 다수는, 그들이 지탱하던 세상은 서서히 멸망해 간다. 이것은 근대의 역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단절되어 ‘공동체’나 ‘인류애’의 개념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19세기의 ‘팬데믹’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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