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너무 좋았던 어느 날, 일기장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만일 내가 걷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불행해 죽을 것이라고. 죽을 만큼 괴로운 게 아니라, 죽어버릴 정도로 괴로울 거라고. 하지만 행복이 내 기대보다 늘 싱겁듯, 불행도 겪어보면 내 상상보다 끔찍하지 않다.
코로나로 7일간 격리되고, 격리 해제되자마자 클라이밍을 하다 발목 인대가 찢어졌다. 많이 아프진 않지만 3주간 반깁스를 해야 한다. 산책은 하지 말아야 될 일 1순위다. 불행해야 마땅한데, 몸과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집에 콕 박혀있어도 답답하지 않고, 편하고 좋기만 하다. 코로나로 격리됐을 땐 산책 대신 스태퍼를 신나게 밟았고, 다리를 다친 지금은 쉴 새 없이 청소하고 정리하며 팔이라도 움직인다. 바깥의 소리가 그리우면 새소리 asmr을 틀어놓고, 성취감이 필요하면 복근 운동을 한다.
물론 지금도 나에게 산책은 중요하다. 다리가 다 나으면 바로 남산공원에 갈 거니까. 하지만 산책을 대체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내겐 이 사실이 콜럼버스의 발견보다 더 놀랍다. 사지가 멀쩡했던 때보다 왜 지금 더 안정적일까? 왜 나는 드디어, 가만히 있어도 평화로울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 삶이 단순해졌기 때문이다! 다치기 전에는 시간을 보내는 경우의 수가 무한했다. 운동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기타를 치거나 쇼핑을 하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공부를 하거나 카페를 가거나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자유로웠으나, 때론 넘치는 자유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일을 해도, 하지 않은 일을 아쉬워했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나갈 수 없으니, 경우의 수가 1/10 정도로 줄었다. 사실, 그 경우의 수엔 허수가 가득하다. 설거지가 귀찮아 감행한 도피성 외출과 일하기 싫어 집중한 딴짓을 걷어내면, 진짜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남는다.
독립생활 9년 차. 단언컨대 지금 가장 쾌적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밥 먹자마자 설거지는 기본이고, 분리수거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화장실 청소엔 진심이 되어 콧노래가 나올 정도라니까? 며칠 전엔 창고에서 기타를 꺼냈다. 당근에서 기타를 산 지 2년 만이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기타 연주인데, 그동안 창고에 쳐박아둠으로써 애써 흐린 눈 했다. 드디어 결심을 하고, 심플리 기타로 배운 지 4일차. 손가락이 너무 아프다. 포기하고 싶지만, 나갈 수가 없어 참는 중이다. 존버는 과연 승리할까? 아무튼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한계를 뛰어넘지 않아도 성장할 수 있다. 그 한계 속에서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한다면. 그러니까, 소 잃고도 외양간을 잘 고칠 수 있으며, 소를 잃어봐야 외양간을 고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