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툰앙마 Mar 05. 2024

거대한 질서로서의 자본주의, 과연 극복 가능할까

좌파의 길(낸시 프레이저, 서해문집, 2023)

자본주의가 '우리를 위해' 우리 등 뒤에서 결정해 온 것을 이제는 '우리가' 집단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 p.280)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시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만천하에 정체를 드러나게 만든 지 150여 년이 흘렀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하고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이데올로기로서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본주의는 항상 절름거리며 위태롭게 걷고 있다. 마르크스가 그 모습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종말과 공산주의로서의 유토피아를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기대에 비아냥거리듯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낸시 프레이저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비-경제 영역으로 분류되는 이면의 질서 체계에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사회적 재생산(출산과 보육), 인간과 비인간(자연) 간의 관계, 인종화된 집단에 대한 수탈, 공적 권력의 작동이 없이는 자본주의가 온전히 버틸 수 없고, 자본주의는 그 비-경제 영역의 장악을 통해 자기 꼬리를 먹는 괴물처럼 덩치를 키워왔다는 것이다. 성장 일변도의 행태를 보이는 자본주의의 비-경제 영역에서 고통을 당하는 피착취(수탈) 그룹의 절망이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데 이로 인해 결국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을 파멸적일 수밖에 없다. 꼬리를 잡아먹는 데에도 분명 한계는 있으니까.


이러한 자본주의를 끝내고 새로운 체계(사회주의가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파멸의 미래가 아니라 공존의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바로 이 비-경제 영역에서 수탈, 착취당하는 그룹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게 낸시 프레이저의 핵심 주장이다.


그동안의 자본주의 비판은 자본-임금-임금 노동의 경제적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해 왔다. 사회의 모든 현상은 이 경제적 메커니즘으로 재구조화되어 해석되었으며 그 안에서 투쟁과 개혁의 방법론을 잉태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제임스 오코너로 이어지는 소수의 비-경제적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간파한 이들에게는 자본주의적 생산 조건으로 작용하는 비-경제적 폐쇄 구조가  분명 존재하며 이들의 파멸을 내버려 두는 한 파멸을 향한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는 공통의 인식이 존재했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주장을 승계하고 더욱 구체화시켜 자본주의의 진짜 위기를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주장은 우리 눈앞에서 전 세계적으로 너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잘 해석하고 그 인과관계를 명확히 했다는 데에 분명 큰 의의가 있다. 여성, 돌봄, 생태계 파괴, 인종, 정치권력에 대한 자본주의적 장악을 논하지 않는 이상 그에 대한 극복을 논하기엔 절대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탁월한 분석과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틀림없다.


하지만 뭔가 2% 부족하다. 그래서 그 연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수히 많은 눈을 부라리며 비-경제 영역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는 자본주의가, 과연 자신의 근간을 뒤흔들고자 시도하는 연대의 움직임을 넋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논의가 아쉬운 결정적인 이유다. 탁월한 분석에 비해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는 부분은 앞으로 그녀가 제시한 주장을 따라갈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에게 맡기는 것일까. 그런 부분에서 아쉽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칫 혁명적 사회주의의 도래만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진 않을까. 그건 오히려 지금의 자본주의를 더 기고만장하게 만들어줄 촉진제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그건 더 최악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주장을 따라 걸을 이들의 주의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로를 향한 기댐과 버팀, 그저 고마울 따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